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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기도와 수련... 동학정신 체현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7] 춘암은 크게 달라졌다

등록 2024.06.04 13:36수정 2024.06.0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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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동학의 고장답게 해월 선생의 동상이 위치해 있다. ⓒ 김환대

 
춘암이 동학에 입도할 즈음 충청도 지역에서 입도자가 많았다. 

당시 충청도 지역에 동학의 교세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시천교종역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때 입도하는 바람이 불어 충주, 청풍, 괴산, 연풍, 목천, 진천, 청주, 공주, 연기 등 고을에서 입도자가 많았다"라고 적고 있다. 충청도 일대에 부는 동학바람에 편승해 춘암도 입도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1883년) 3월에 손병희·손천민·박인호, 황하일, 서인주, 안교선, 여규덕, 김은영, 유경순, 이성오, 이일원, 여구신, 김영식, 김상호, 안익영, 윤상오 등이 차례로 신사를 배알했다."라는 기록을 통해 춘암의 입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해월은 이때 젊은 인재가 연이어 교단에 들어오자 앞으로 우리 도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뻐했다. (주석 1)

춘암은 이때 해월이 간행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두 권을 받아 덕산으로 돌아왔다. 경전을 익히며 의문점이 생기면 스승을 만나러 단양으로 찾아갔다. 얼마나 걸음이 빨랐던지 그가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해월은 춘암의 열성과 됨됨이를 지켜보면서 장차 교단에 크게 쓰임이 될 인재로 꼽았다.

해월은 그에게 공주에 있는 가섭암(迦葉庵)에 가서 49일 기도를 명하고 춘암은 이에 따랐다. 수련을 통한 교리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경전을 익히며 수련을 하면서 동학인으로 거듭났다. 

춘암이 가섭암에서 수련을 마칠 즈음 해월은 1884년 6월 전라도 익산 금마면 소재 사자암에 은거하고 돌아와서 이 해 10월 손병희, 춘암, 송보여를 데리고 공주 가섭암으로 들어가 독공 수련을 하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을 집중적으로 지도해 교단의 동량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주석 2)


춘암은 해월과의 가섭암 기도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승과 함께 수행하면서 동학 수련의 심오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해월은 가섭암 기도에서 <강시(降詩)>와 <강서(降書)> 여러 편을 받았다. <강시>와 <강서>는 깊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시와 글이다. 춘암은 해월의 수련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수행이 보잘 것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석 3)

가섭암의 49일 기도와 스승과 함께한 가섭암 재수련으로 춘암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어육주초를 끊고 의관을 갖추고 10년 독공과 연성을 하기로 다짐하였다.


"특히 잠을 잘 때에도 낮자루를 베고 잘 정도로 수련에 열중하였다는 일화를 통해서 훗날 교단 정비, 민족독립과 문화운동, 신간회, 멸왜기도운동 등 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그의 강한 정신력과 리더십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기에 면천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주석 4)

춘암은 크게 달라졌다. "그가 얼마나 극진히 수행에 임했는지는 논밭을 갈 때도 망건을 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기 위해 틈틈이 해월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며 내포 일대의 포덕 교화에 힘썼다. 

동학 입도 후 달라진 춘암에 대해 덕산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힘으로 하면 인근에 당할 사람이 없고 효성 또한 지극한 춘암이 자나깨나 동학에만 정진하니 그 까닭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춘암의 지극한 정성을 본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농반 진반으로 "아무리 스승에 대한 예가 높고 그 가르침이 좋다해도 농사짓는 사람의 옷매무새가 어찌 그러한가?"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춘암은 "한울님은 정성이 지극한 사람에 가까우니라. 내 비록 불편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한울의 은혜를 입는 것에 비하면 한낮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성이 한울님의 은혜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고 말하여 흔들림없이 수행에 정진하였다. (주석 5) 

춘암이 동학에 입도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즈음 시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876년 2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동시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핑계로 8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보내 조약을 강요했다. 

1880년 8월 수선사로 일본에 파견했던 김홍집이 귀국길에 청국 황준헌이 저술한 <조선책략>을 가져와 왕에게 바치면서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만인소 등이 일어났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같은 해 7월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역시 불평등한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1884년 10월 김옥균, 김윤식·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래저래 국가 운명이 크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주석 
1> 성길현, 앞의 책, 45쪽, 재인용.
2> 성길현, 앞의 책, 46쪽.
3> 앞의 책, 46~47쪽.
4> 조극훈, 앞의 책, 146쪽.
5> 서강현, 앞의 책, 47~4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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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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