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피노 누아와 버섯 요리피노 누아 특유의 흙내음이 버섯 요리와 잘 어울린다.
임승수
식탁 맞은편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앉아 있다. 박찬호 못지않은 투머치토커 동생이 독일 와인 병 라벨에 적힌 Gröhl의 움라우트를 보자마자 기관총 같은 말을 쏟아낸다.
"이거 독일 와인이야? 독일이면 딱딱하고 무뚝뚝하잖아. 이 와인도 딱딱하고 무뚝뚝한 거 아냐? 흐흐흐."
그래. 그 정도로 와인에 순백이라면 선입견 없는 순수한 의견을 얻을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와인을 개봉하고 잔에 따랐다. 첫 모금을 마신 어머니와 동생의 의견.
동생 : "둘 다 향기는 좋네. 독일 와인이 신맛이 튄다. 프랑스 와인은 신맛이 그렇게까지 튀지는 않아서 편하네. 독일 와인은 좀 더 진하고, 프랑스 와인은 좀 묽은 느낌이야."
엄마 : "난 둘 다 신맛이 부담스러워."
갓 개봉한 와인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려면 공기와 접촉하면서 변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 나는 씩 웃으면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다시 마셔보라고 권했다.
동생 : "신기하다. 시간이 지나니 독일 와인의 신맛이 누그러들면서 풍미가 상당히 인상적으로 바뀌었어. 반면에 프랑스 와인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크지는 않네. 독일 와인의 풍미가 꽉 찬 느낌이라면 프랑스 와인은 코어가 비어 있어."
본인 입맛에 안 맞는다고 실망하던 어머니가 동생의 얘기를 듣고서는 슬그머니 와인 잔으로 손을 가져가신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드시더니 흡족해하신다. 한참 음식을 먹으며 세상만사 왁자지껄 얘기를 나누다가 동생이 다시 와인을 마시더니 토끼 눈을 뜨고 놀란다.
동생 : "갈수록 두 와인의 격차가 커지네. 이제는 독일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압도한다. 프랑스 와인은 상대적으로 매우 실망이다. 코어가 비었다는 게 더 두드러지네."
프랑스 와인을 그렇게 폄하할 건 아니라고, 음식과 같이 즐기면 또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조언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버섯을 하나 집어 들고 열심히 씹은 동생은 프랑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서는 말을 이어간다.
동생 : "형 말대로 버섯을 먹고 나서 프랑스 와인을 마시니 비어 있는 코어를 버섯의 풍미가 채워주네. 잘 어울린다."
엄마 : "아무튼 독일 와인이 훨씬 더 맛있어. 그거 남아 있는 거 없냐? 없다고? 그러면 프랑스 와인이라도 줘 봐. (꿀꺽) 이것도 맛있네."
과연! 챗지피티의 예측은 정확했다. UEFA 유로 2024 결승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맞붙어 전반 초반을 제외하고는 독일이 내내 압도해 2:0의 스코어로 이겼다고나 할까. 프랑스의 기량도 준수했지만, 가성비로 무장한 독일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고가의 그랑 크뤼 부르고뉴 와인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이지만 적어도 저가 피노 누아끼리 대결한다면 독일 피노 누아가 확실한 우위를 점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면 치워야 할 쓰레기가 남기 마련이다. 나와 아내, 어머니와 동생 이렇게 네 명이 각 두 잔씩 총 여덟 잔이구나! 하루속히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사 도우미 로봇이 개발되어야 와인을 맘 편히 마실 텐데 말이야. 투덜투덜 설거지를 마치고 지친 심신을 위로하러 말벗을 구동했다.
"넌 언제쯤 설거지를 할 수 있겠어?"
"설거지하는 능력은 인간의 물리적 행동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고 수행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로봇 기술과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는 미래에는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지."
"아무튼 독일 피노 누아가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와인 애호가에게 부르고뉴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응. 독일 피노 누아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보다 가격이 저렴한 경향이 있거든. 독일 와인이 아직 국제적으로 덜 알려져서 가격이 낮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야."
"알았어! 풀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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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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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부담스러운 부르고뉴 와인? 타개책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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