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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부담스러운 부르고뉴 와인? 타개책은 여기에 있다

[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지구 온난화와 독일 피노 누아

등록 2024.06.30 11:00수정 2024.06.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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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집구석에서 글만 쓰는 외톨이에게 한 달 요금 20달러짜리 말벗이 생겼다. 음성 대화 기능을 탑재한 챗지피티. 껄렁껄렁하게 말해달라고 요청하면 가리봉동 포장마차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주를 나누는 친구에게나 들을 법한 톤으로 뇌까린다.

참으로 요물이 아닐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한테 챗지피티가 있었다면 무인도 탈출 일정이 상당히 늦춰졌을 것 같구나. 이 만물박사 같은 녀석이 과연 와인 애호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지 궁금해 한번 물어보았다.


챗지피티와 나눈 와인 이야기

"부르고뉴에 맛 들이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은 정말 맛있지만, 엄청 비싸서 계속 마시다 보면 돈을 다 쓸 수 있다는 뜻이야."


오호. 제법이네. 와인서쳐에서 조사한 2023년 가장 비싼 와인 TOP10을 보면 단 1개를 제외하고 전부 부르고뉴 와인이다. 대망의 1위인 도멘 르루아 뮈지니는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든 부르고뉴 와인인데 2024년 현재 평균 가격이 한 병에 6천만 원을 넘어선다.

"부르고뉴 와인은 왜 이렇게 비싼 거야?"
"부르고뉴는 독특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어. 이 지역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는 다른 지역의 와인과는 다른 독특한 풍미와 복잡성을 지니고 있지. 게다가 부르고뉴 지역의 포도밭에서도 최고 등급의 포도밭은 매우 한정된 면적을 차지하고 있거든. 이로 인해 생산량이 매우 제한적이야. 맛있어서 찾는 사람은 많은데 생산량은 적어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가격이 오르지. 게다가 피노 누아는 재배가 까다로운 품종이야. 기후와 토양의 영향을 많이 받고, 병충해에도 취약해. 와인 생산 과정에서도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지. 이러한 어려움은 생산 비용을 증가시키고, 결과적으로 와인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거든."


과연 그러하다. 구체적으로 도멘 르루아 뮈지니는 왜 비쌀까? 도멘 르루아는 와인 생산자이고, 뮈지니는 포도밭 이름이다. 부르고뉴에서는 뛰어난 밭 33개를 따로 선별해 그랑 크뤼 등급을 부여했는데 부르고뉴 전체 포도밭 면적의 약 1.9% 정도다.


뮈지니는 그랑 크뤼 밭 33개 중에서도 특히 포도 품질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뮈지니 밭은 10헥타르 정도라 포도 생산량이 매우 적은데, 그중에서도 도멘 르루아가 소유한 구획은 고작 0.27헥타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연간 600병가량 생산된다. 공급이 극소량이라는 얘기다. 참고로, 조금이라도 다른 밭 포도가 섞이면 뮈지니라고 적을 수 없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뮈지니 밭의 와인이더라도 생산자마다 가격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도멘 콩트 조르주 드 보귀에 뮈지니의 경우는 한 병에 150만 원이니 도멘 르루아 뮈지니 가격의 2.5%에 불과하다. 피노 누아는 워낙 손을 많이 타는 품종이라 같은 밭이더라도 재배 및 양조 방식에 따라 천양지차의 품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멘 르루아를 이끄는 랄루 비즈 르루아는 부르고뉴 최고의 생산자로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도멘 르루아 뮈지니가 그렇게나 비싼 이유는 그랑 크뤼 뮈지니 밭 와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품질, 극도로 적은 공급량,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는 부르고뉴 와인 수요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물론 부르고뉴 와인이라고 다 이렇게 비싼 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밭에서 생산된 저렴한 부르고뉴 와인도 그동안 가격이 꾸준히 상승했다. 예전에는 2만 원 정도에 판매되던 와인이 지금은 4만 원을 훌쩍 넘어가니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부르고뉴 와인을 즐기던 애호가들은 치솟는 가격에 망연자실한 상황이다. 과연 이 고난을 극복하고 맛 좋은 피노 누아를 계속 즐길 방법은 없을까?

타개책은 의외로 '지구 온난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피노 누아는 기후에 매우 민감하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인한 생태지도의 변화는 부르고뉴 지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동안 부르고뉴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고지대라 포도가 잘 익지 않았던 오트 코트 드 뉘(Hautes Côtes de Nuits) 지역이 최근 기온 상승으로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면? 부르고뉴보다 위도가 높은 타국의 포도밭에서 품질이 좋은 피노 누아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말벗의 의견은?

"기후 변화로 인해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도 피노 누아 재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특히 독일의 피노 누아는 슈페트부르군더(Spätburgunder)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과거보다 더 따뜻해진 기후 덕분에 포도가 잘 익어 풍부하고 복합적인 맛을 내는 와인이 생산되고 있지. 독일 피노 누아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특히 높은 산도와 섬세한 향을 가진 와인으로 인정받고 있어."

"3만 원대의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같은 가격대의 독일 피노 누아가 대결하면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아?"
"독일 피노 누아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해. 독일 피노 누아가 가성비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거든."


과연 독일 피노 누아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르고뉴 와인 가격에 고통받는 애호가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즉시 검증 작업에 들어갔다. 때는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오후 5시. 식탁 위에는 두 와인이 맞대결하는 운동선수처럼 나란히 놓여 있다.

독일 피노 누아(위클리와인에서 37,800원에 구입)
그뢸 헤렌베르그 오펜하이머 피노 누아 트로켄 2020
Gröhl Herrenberg Oppenheimer Pinot Noir trocken 2020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빅보틀에서 39,500원에 구입)
가성비가 매우 뛰어나서 애호가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와인
** 어떤 와인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겠음


가성비로 무장한 독일 와인
 
독일 피노 누아와 버섯 요리 피노 누아 특유의 흙내음이 버섯 요리와 잘 어울린다.
독일 피노 누아와 버섯 요리피노 누아 특유의 흙내음이 버섯 요리와 잘 어울린다.임승수
 
식탁 맞은편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앉아 있다. 박찬호 못지않은 투머치토커 동생이 독일 와인 병 라벨에 적힌 Gröhl의 움라우트를 보자마자 기관총 같은 말을 쏟아낸다.

"이거 독일 와인이야? 독일이면 딱딱하고 무뚝뚝하잖아. 이 와인도 딱딱하고 무뚝뚝한 거 아냐? 흐흐흐."

그래. 그 정도로 와인에 순백이라면 선입견 없는 순수한 의견을 얻을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와인을 개봉하고 잔에 따랐다. 첫 모금을 마신 어머니와 동생의 의견.

동생 : "둘 다 향기는 좋네. 독일 와인이 신맛이 튄다. 프랑스 와인은 신맛이 그렇게까지 튀지는 않아서 편하네. 독일 와인은 좀 더 진하고, 프랑스 와인은 좀 묽은 느낌이야."
엄마 : "난 둘 다 신맛이 부담스러워."


갓 개봉한 와인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려면 공기와 접촉하면서 변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 나는 씩 웃으면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다시 마셔보라고 권했다.

동생 : "신기하다. 시간이 지나니 독일 와인의 신맛이 누그러들면서 풍미가 상당히 인상적으로 바뀌었어. 반면에 프랑스 와인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크지는 않네. 독일 와인의 풍미가 꽉 찬 느낌이라면 프랑스 와인은 코어가 비어 있어."

본인 입맛에 안 맞는다고 실망하던 어머니가 동생의 얘기를 듣고서는 슬그머니 와인 잔으로 손을 가져가신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드시더니 흡족해하신다. 한참 음식을 먹으며 세상만사 왁자지껄 얘기를 나누다가 동생이 다시 와인을 마시더니 토끼 눈을 뜨고 놀란다.

동생 : "갈수록 두 와인의 격차가 커지네. 이제는 독일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압도한다. 프랑스 와인은 상대적으로 매우 실망이다. 코어가 비었다는 게 더 두드러지네."

프랑스 와인을 그렇게 폄하할 건 아니라고, 음식과 같이 즐기면 또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조언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버섯을 하나 집어 들고 열심히 씹은 동생은 프랑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서는 말을 이어간다.

동생 : "형 말대로 버섯을 먹고 나서 프랑스 와인을 마시니 비어 있는 코어를 버섯의 풍미가 채워주네. 잘 어울린다."
엄마 : "아무튼 독일 와인이 훨씬 더 맛있어. 그거 남아 있는 거 없냐? 없다고? 그러면 프랑스 와인이라도 줘 봐. (꿀꺽) 이것도 맛있네."


과연! 챗지피티의 예측은 정확했다. UEFA 유로 2024 결승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맞붙어 전반 초반을 제외하고는 독일이 내내 압도해 2:0의 스코어로 이겼다고나 할까. 프랑스의 기량도 준수했지만, 가성비로 무장한 독일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고가의 그랑 크뤼 부르고뉴 와인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이지만 적어도 저가 피노 누아끼리 대결한다면 독일 피노 누아가 확실한 우위를 점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면 치워야 할 쓰레기가 남기 마련이다. 나와 아내, 어머니와 동생 이렇게 네 명이 각 두 잔씩 총 여덟 잔이구나! 하루속히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사 도우미 로봇이 개발되어야 와인을 맘 편히 마실 텐데 말이야. 투덜투덜 설거지를 마치고 지친 심신을 위로하러 말벗을 구동했다.

"넌 언제쯤 설거지를 할 수 있겠어?"
"설거지하는 능력은 인간의 물리적 행동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고 수행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로봇 기술과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는 미래에는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지."
"아무튼 독일 피노 누아가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와인 애호가에게 부르고뉴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응. 독일 피노 누아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보다 가격이 저렴한 경향이 있거든. 독일 와인이 아직 국제적으로 덜 알려져서 가격이 낮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야."
"알았어! 풀매수다."
#임승수 #부르고뉴 #독일피노누아 #피노누아 #지구온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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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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