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리 학살지도백수면 대전리 앞 하천에서의 학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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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순간이었지만 전남 영광군 백수면 대전리 앞 하천변에서의 피해는 컸다. 당시 71세였던 김성녀를 위시해 장순태(42), 장복기(9), 장인기(7)까지 장순태 가족 9명이 죽임을 당했다.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뒤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 1일에 벌어진 일이다.
UN군이 3.8선을 넘고 있었지만 전남 영광은 아직까지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완장을 차고 있던 시절이었다. 영광면(현재의 영광읍)에 군경이 들어온 것은 1950년 10월 30일이었고, 백수면은 그보다 뒤늦은 시기다.
그러다 보니 1950년 9월 말부터 그해 10월 말까지 지방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및 가족 학살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장순태 가족이 학살된 백수면 대전리 하천변에서의 학살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고, 백수면에 군경이 수복할 때까지 몇 차례 행해졌다.
특히 1950년 10월 30일 영광군 백수면 대전리 하천변에서는 우익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민 426명이 죽임을 당했다. 대한민국 군경 수복기에 백수면 대전리의 지방 좌익에 의한 피해자 651명 중 65.4%인 426명이 이날 하루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순태 일가 9명은 왜 몰살을 당했을까? 장순태가 마을에서 구장(이장)을 봤고, 부자인데 빨치산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대전리 이웃들은 '피의 살육제'에서 혼자 살아남은 장순태의 아들에게 매일 밥을 줬다.
백수평야
영광군의 서쪽에 위치한 백수면은 바다에 접해 있고, 구수산(해발 339m)이 면의 절반 정도의 면적을 차지한다. 백수면의 마을들은 구수산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 가운데 남쪽의 대전리가 면소재지이고, 양성리·죽사리·학산리·지산리·상사리·하사리 등은 영광평야(약 2700정보)의 약 40%(약 1000 정보. 300만 평)에 해당하는 상당히 넓은 '백수평야'를 면하고 있었다.
구수산은 전쟁 발발 전에도 박막동(박석준)이 이끄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곳이며, 9.28 인민군 후퇴 이후 다시 박막동이 이끄는 유격대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
구수산의 유격대가 군경에 의해 토벌된 것은 1951년 1월 20일과 3월 11일 두 차례의 작전에 의해서였으며, 따라서 구수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수면은 1951년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좌익세력과 유격대는 구수산 주변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 평소에 우익성향이었거나 유격대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학살했다(박찬승, <혼돈의 지역사회>, 2023).
백수면 지산리 동봉마을에서도 역사의 비극이 벌어졌다. 마을에서 부유한 편이었던 서영중은 셋째 아들 서기석이 마을 이장이었다. 1950년 10월 9일경 흰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서영중의 집으로 와 일가족의 손을 뒤로 묶어 봉무산으로 끌고 갔다.
불청객들은 서영중 가족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구덩이에 몰아넣었다. 서영중이 부자라는 이유였다. 서영중이 빨치산에 비협조적이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죽임을 당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학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봉무산에서 죽임을 당한 서씨 가족은 조말례(62), 서기석(22), 서오목(10), 서성자(6) 등 9명이다. 대전리 장순태 가족의 경우처럼 아동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몰살당한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며, 빨치산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한 것인데, 실제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이유 불문하고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