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회갑 맞아 감회의 시문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1] 이제까지 지내온 파란곡절의 삶을 돌이키면서

등록 2024.07.17 13:48수정 2024.07.17 13:48
0
원고료로 응원
a 중화당 충남 청양군 모덕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살던 '중화당'

중화당 충남 청양군 모덕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살던 '중화당' ⓒ 하주성

 
조선왕조는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의 '옆으로부터의 개혁'과 전봉준 등 혁명파의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모두 좌절되면서, 여전히 무능한 보수반동 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다. 광제창생·척왜양이를 내걸고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이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진압되면서 혁명적인 변혁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지배층은 동학농민혁명이 비록 좌절되었으나 국정개혁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을 모르는 채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갑오개혁에 나섰다. <홍범14조>는 갑오개혁의 정신을 명문화한 정치 강령으로, 황실과 국가 사무의 분리, 인재등용에서 문벌을 타파할 것, 법에 의한 조세 징수, 징병제 실시 등의 개혁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주체세력이 없고 추진 동력이 미약하여 실행에 효과가 별로였다. 그나마 갑오개혁이 일본인들의 영향권 아래서 추진됨으로써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일본군은 떠나지 않고 눌러 앉았다. 1895년 8월 20일 민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정부는 이에 앞서 1894년 6월 조정신하들의 전통적인 대례복을 간소하게 흑색으로 만들어 입게하는 변복령과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침략 행위가 점차 노골화하여 왕조의 운명을 위협하였을 뿐 아니라, 청일전쟁 승리로 그들의 오만심은 날로 높아만 갔다. 청일전쟁은 삼국간섭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입장이 불리하게 되자, 퇴색을 만회하기 위하여 친청 노선의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사변으로서 이같은 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배일감정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친일정권에 위한 '단발령'은 전통을 숭앙하는 유림들을 격분시켰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선생은 이를 좌시할 수 없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청토 역복의제상소 (請討逆復衣制上疏)>(1895. 63세)를 올려 또 다시 위정척사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 (주석 1) 
a  채용신 님이 그린 최익현 님 초상화.

채용신 님이 그린 최익현 님 초상화. ⓒ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 변복령 등 조선의 오랜 전통을 깨뜨리는 일련의 조치에 면암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다시 그야말로 '정(正)'을 지키고 '사(邪)'를 물리친다는 위정척사의 실천적 계기가 도래한 것이다. 1895년 6월 상소를 통해 관제와 의제 등을 갑오경장 이전으로 복구할 것을 주창하였다. 상소의 한 대목이다.

지금 비록 하나하나 따질 수는 없으나, 오직 의복제도를 변경하는 일은 더욱 의리를 심하게 해치고 있으니, 시급하게 먼저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의복은 선왕들께서 오랑캐와 중화를 분별하고 귀천을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복제도가 지극히 옛법에 부합되지는 않지만, 이는 중화문물이 내재되었으며 우리나라 풍속을 볼 수 있어서 선왕과 선정(先正)이 일찍이 강론하여 밝혀 준수해 온 것이니, 천하의 만국이 일찍이 우러러 사모하며 찬탈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버리게 된다면 요·순·문·우가 전승해 온 중화의 한 줄기를 찾을 수가 없게 되고, 기자(箕子) 및 우리 조종(祖宗)이 중화의 풍속을 가져다가 오랑캐를 변화시킨 훌륭한 덕과 큰 공로를 천하의 후세에 밝힐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를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면암집>) 

향리에서 칩거중이던 면암은 1893년 12월 회갑을 맞았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조정에서 그를 공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나 회갑의 의미가 낮아졌지만, 당시에 회갑(연)은 일생의 큰 행사였다. 선비들의 경우는 특히 각별하였다. 면암은 이제까지 지내온 파란곡절의 삶을 돌이키면서 감회를 남겼다.


 내 다행히 이 나라에 태어나서
 어느덧 60년 꿈속에서 보냈네
 터럭은 다만 조석으로 변하는데
 마음만은 오히려 한창때와 같구나
 만 번 생각해도 부모 은덕 갚기 어려운데
 다시 만든 천지의 공 잊을 수 있으랴
 인생살이 공사 간에 다소 감회 일어나
 섣달 가난한 집에서 나라를 근심하네.(<면암집>)

이 시기에 면암은 개인적으로 큰 아픔을 연거푸 겪었다. 아버지가 작고하고(1887년) 중암 김평북이 1891년 12월 타계하였다. 의지하며 가르침을 받아온 두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지은 중암의 제문에 아픔의 심경을 담았다.

오호라, 나는 우매하여 백 가지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외람되게 선생의 사랑을 받아, 몹시도 간절하게 저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도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천품이 우매하여 두텁게 가리어 알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뜻이 서지 못하고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가르침의 만분의 일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중간에는 벼슬길에 정신이 팔려 선생 곁을 수십년 떨어져 지냈다.

늦게서야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만년을 잘 수습하여 과거의 허물을 고쳐보려고 하였지만, 덧 없이 머리는 희어지고 이가 빠지고 말았다. 이제 선생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사는 날로 그르고 우리의 도가 더욱 외로워져 슬픈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쏟아진다.

오호라, 스승의 자리가 참담하고 적막하니, 경색(景色)은 처창(悽愴)하여 한을 머금은 듯하고 시냇물은 목이 메어 우는 듯하도다. 천장지구(天長地久)로다. 이 끝없는 이별이여! 장하(長河)를 기울인 듯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이는 내 평생 의지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로다.(<면암집>)

  
주석
1> 홍창욱, 앞의 책, 20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남명학'의 알짬 몇 마디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유인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2. 2 서울대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서울대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3. 3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4. 4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5. 5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