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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 을미의병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2] 고종은 면암에게 의병을 회유하라는 칙명 내려

등록 2024.07.18 13:29수정 2024.07.1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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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발령(1895)은 을미사변과 함께 을미의병 창의의 동기가 되었다.

단발령(1895)은 을미사변과 함께 을미의병 창의의 동기가 되었다. ⓒ 자료사진

 
1895년 11월 15일 내린 단발령은 국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김홍집 내각은 '위생적이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명령했다. 고종과 태자가 이날 머리를 잘랐다.

"이때 유길준·조의연 등이 왜인들을 인도해서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머리를 깍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고종은 길게 탄식을 하며 조명하를 돌아보고 '네가 내 머리를 깎으라'고 하였다. 조명하는 가위를 들고 고종의 머리를 깎았고 유길준은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곡 소리가 진동했다."(황현 <매천야록>)

면암은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 지언정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고 단호히 반대하였다. 재야 유림들은 모처럼 한덩어리가 되어 그의 언행을 지켜봤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면암은 일본에 의존하는 개화정책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상소 <청토역복위제소>를 올렸다. 잇따라 민 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 당시 단발령을 주도하던 유길준은 면암이 단발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순검을 보내 체포하여 서울 사관(私館)에 구금하였다. 1896년 초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고 김홍집이 피살되며 유길준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단발령이 정지되었다. 이에 면암도 풀려나 귀향하였다. (주석 1)

오늘의 시점에서 단발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은 신체·머리 털·살갗은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 효의 기본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와 조선의 1천년 동안 이어져온 인륜의 기본이고 효의 상징으로 여겼다. 백성들은 조정이 나서서 이를 어기고 군주가 단발을 하는 행위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것도 일본의 강요에 따른 것으로 여겼고, 이를 강박하는 정부와 일본을 함께 묶어 적대시하였다. 

민 왕후의 살해와 단발령은 타는 민심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었다. 큰 길목마다 순검들이 가위를 들고 행인들의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소문이 돌고, 실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이 나타나면서 서울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으며, 지방 상인들이 서울로 오지 않아 물자 공급이 끊겨 서울의 물가가 폭등했다.


청도를 비롯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이다. 일본 수비대와 거류민, 개화정치를 강제하던 군수와 관찰사를 공격하여 반일감정을 가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군의 학살만행으로 좌절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의기가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한때 수감하였던 면암에게 을미의병을 위무하여 해산시키는 일을 맡도록 '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으로 임명하였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면서 단발령 실행을 거부해온 그가, 그의 명성이 각지의 의병들을 위무하는 데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면암은 포천 향교에 유림 5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유림이 서울에서 가까운 이 지역은 거사할 적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의를 만류한 것이다.
 
a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 자료사진

 


조정에서는 각지의 의병이 더욱 세를 더하면서 전국으로 번지자 거듭 면암에게 각 부군 선유대원을 맡도록 칙명을 내렸다. 칙명이다.  

슬프다. 하늘이 우리를 돌보지 않아 나라에 해마다 화란이 잇달았는데 지난 해 8월 국변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모든 우리 신민으로서 흉적하는 같은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음을 맹세함은 타고난 천성이니, 서로 이끌고 의거를 주창하는 것은 괴이한 것이 없도다. 

지금 역괴가 죽음을 당하고 흉당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실로 다시 의거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머리 깎는 일은 본디 위협하여 강제로 시행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편의대로 하라는 조칙이 잇달아 어렸으니, 이를 빙자하여 주저하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염려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들의 의심스런 단서를 타파하지 못하였고 또한 이에 모인 무리들로 갑자기 해산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경은 노성한 인망으로 백성의 표준이 되었으니, 신중한 한 마디 말이 반드시 신임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을 뽑아 선유대원으로 명하여 기내의 여러 군읍과 동서 각부의 의거 민중이 목인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조정에서 내린 의사를 백성에게 자세히 선포하게 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즉시 이 길을 떠나 속히 일을 마치고 복명할지어다.(<면암집>)

우리 속언에 떡 줄 사람에게 묻지 않고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의 그대로였다. 의병에 뜻을 두고 거사를 준비하는 면암에게 고종은 의병을 회유하라는 칙명을 내린 것이다. 이즈음  거의 동시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아본다. 

을미사변으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또 봉기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해, 다시 민비의 폐위와 복위의 공표가 잇따랐고, 러시아와 미국 군대가 서울에 입성하였고, 훈련대의 해산과 친위대와 진위대의 편성이 발표되었고, 춘생문 사건이 터지는가 하면 이를 계기로 재차 집권한 김홍집 내각은 1895년 말 즉, 11월 15일(양 12월 30일)에 단발령을 공포하여 학부대신 이도재가 사직하는 등 또 소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관리들은 단발령을 강행하기 위하여 가위를 들고 상투를 잘라댔다. 일본이 단발령을 내리게 한 것은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전국의 유생이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다. (주석 2)
  

주석
1> 금장태, 앞의 책, 215쪽.
2> 조동걸, <한말 의병전쟁>, 31~32쪽,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연구소, 1989.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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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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