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대표 문경식(61)
이민선
자칭 완소남 문경식이 최초로 한 사회사업은 희망세움터 뿌리(전신)인 안양 한무리교회 공부방 자원봉사 교사. 먹고 사는 일만 열심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초중고생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것의 그의 화려한(?) 인생 2막의 출발점이다.
그 뒤 체질에 맞지 않다고 느끼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공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에 밤 10시까지 학생들 가르치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자원봉사 하던 한무리 나눔의 집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사회복지 길로 깊숙이 들어왔다.
허전만 마음은 어느 정도 채워졌지만 가벼워진 지갑이 문제였다. 웬만해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무던한 아내. '돈 벌어오라'고 눈치 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으로서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직장 일에 바쁜 아내를 위해 설거지, 빨래 같은 가사 노동을 성심껏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말끔히 떨칠 수는 없었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에도 연봉 5000만 원이 훌쩍 넘는 '좋은 자리 제안'이 계속돼 내적 갈등이 심했다. 5000만 원은, 그가 인생 2막을 시작하던 약 25년 전 기준으로는 꽤 높은 연봉이다. 한 달 75만 원 정도 하던 한무리 나눔의집 사무국장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선언'이다.
"나도 자꾸 흔들려서 주변 사람들한테 '난 사회복지에 목숨을 걸겠다'라고 선언해 버렸어요.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도, 당시 주변 사람들은 특히 난치병 아이를 둔 부모들은 제가 '한 1~2년 하고 말겠지' 추측했다고... 난치병 아이를 둔 부모도 아닌데, 과연 오래 할 수 있을까, 생각한 거죠. 지금까지 이 일 하는 것 보고 놀라는 분들이 많아요."
그는 자기 자신, 그리고 선언이라는 방법으로 뭇사람들과 한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한무리 나눔의 집을 모체로 한 (사)난치병운동본부를 지난 2002년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창립을 주도했고, 2010년에는 장애통합지원센터 희망세움터를 열어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든든함 보금자리로 자리 잡게 했다. 사업을 넓혀 지금은 두리망 장애인 주간 보호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다.
두리망은 지난 2022년 문을 열었다.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을 낮 동안 보호해,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며 경제 활동을 유지하도록 돕고 있다. 장애인 자립을 위한 직업 교육 훈련과 성교육 인권 교육, 보호자 상담, 재활 서비스 등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장애인에 대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생일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도 챙겨 준다. 장애인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게 궁극의 목표다.
장애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