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눈빛출판사
수 차례 상소를 통해 국난극복의 방략과 국정쇄신 그리고 불법적인 을사늑약의 폐기와 5적신의 처형을 진언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제 고종은 허수아비 군주일 뿐이었다. 일제는 지체없이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했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다시 항일의병이 전국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의병 부대에서는 <창의가(倡義歌)>가 불렸다. 후반이다.
보국안민 버려두고
난국난민 웬말이냐.
세상이 이러하니
팔도 의병 났네.
무슨 일 먼저 할까.
난신적자 목을 잘라,
왜적 퇴송 연후에
보국안민하여 보세.
대소인민 물론하고
동심동력 일어나면,
의병 두 자 높은 이름
천하에 내놔보라.
조야가 일심하면
무엇일들 못 할손가!
돌아오라 돌아오라
창의소로 들어오라.
만일 만일 오지 않고
왜적에 종사하여,
불행히도 죽게 되면
황천에 돌아가서,
무슨 면목 가지고서
선왕 선조 뵈올소냐!
집에 있는 사람들아!
화포화승 제조하여,
의병을 후원하면
쉽사리 성공하리.
부탁이요 반심 없이
이 진(陳) 저 진(陣) 접대하라. (주석 1)
면암은 의병투쟁에 나섰다.
74세의 노구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나이 탓이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말(글)로서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 행동으로 나섰다. 면암의 의병투쟁은 1906년 초부터 구체화되어 그 해 3월 전라도 태인으로 내려가서 임병찬을 만나 그와 함께 동지 규합과 군사활동을 준비하였다.
그가 노령에도 의병투쟁에 나서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
면암은 각지 유림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판서 이용원·김학진, 관찰사 이도재, 참판 이성렬·이남규 그리고 거유인 면우 곽종석과 간재 전우 등에게 편지를 보내 창의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서는 고창 출신의 유생 고석진과 진안 출신의 최제학 그리고 전 낙안군수 돈헌 임병찬 등이 의병을 도모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정산에 있던 면암을 초빙하여 의병장에 추대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주석 2)
의병장으로 초빙 받은 면암은 전혀 연고가 없는 호남으로 향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지금 우리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나 반드시 각도, 각군과 성세를 합쳐야만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 영·호남을 깨워 일으켜 호서와 함께 서로 성원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주석 3)
그가 호남을 의병전쟁의 기지로 삼은 것은 임병찬이 보내온 <윤통문>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여러 말을 할 것도 없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나와도 형편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여기서 통절히 느낀다. 대저 전쟁의 승패는 강약과 이둔(利鈍)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슬기롭고 용감한 장수가 충전되고 의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일심동력으로 하는 데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장량·제갈량의 인재인들 어찌 일찍 세상에 시험하여 본 다음에 나왔던 것이겠는가? 충의의 분노가 격동되면 여기서 의로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군율과 의복제도·기계 규정 등 여러 조항을 후면에 적어서 통문을 띄우며, 모일 장소 및 일자는 추후 알리겠으니, 모든 것을 예비하여 추후 통문을 기다리며 혹시라도 태만 소홀하여 군율을 범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주석 4)
임병찬은 면암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는 실무의 책임을 맡고 각지의 의병모집에 나섰다. 태인 지역의 산포수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때 사용했던 각종 무기를 수집하여 무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면암이 주도하는 태인의병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최익현 의병진은 홍주 의병의 홍주성 공방전 직후인 6월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여러 유생을 모아 강회를 개최하여 창의 구국을 결의한 뒤, 곧 향교로 들어가 고제를 올리고 향장(鄕長) 수서기(首書記)를 불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하였다.
이에 온 고을의 환호를 받으며 임병찬·김기술·유종규·김재구·강종희·이동주·이용길·손종궁·정시해·임상순·임병인·송윤성·임병대·이도순·최종달·신인구 등으로 의병진의 각 부서를 담임시키어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거의한 최익현의 의병진은 그 다음날 행군을 시작하여 순창으로 향하였다. 그 날로 정읍에 도착하여 민중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그곳의 소총 20정과 화약 1백 근 및 지세금을 접수하고 또한 병사를 증강시켰다. 곧 내장사에 행군을 옮겨 하룻밤을 지냈으며, 6일에는 순창군 귀암사(歸岩寺)에 유숙하고 7일에는 순창에 입성하였다. 입성 즉시 소총 25정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하였는데, 그때 각지에서 래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도 5백 명에 달하였다. (주석 5)
주석
1>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46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 박민영, 앞의 책, 152~153쪽.
3> 앞의 책, 153쪽
4> 윤병석, 앞의 책, 96쪽.
5> 앞의 책, 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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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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