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1960년대 형과 동생 아랫줄 오른쪽 김태영, (중) 2016년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약산 김원봉' 편의 한 장면, (우) 2018년 11월 의열기념관에서 생전 마지막 모습. 사진 제공 김태영.
김영희
- 이 사진들에 사연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왼쪽 사진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연인데요. 아주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4살 때 마산 고아원에서 숟가락도 없이 조개껍질로 죽을 떠먹고 그랬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형과 고아원을 도망 나와 무작정 걷다가, 혼자 구멍가게를 하는 고마운 할머니를 만났어요. 우리를 씻겨주고 밥도 주었어요. 할머니가 어떻게 너희들만 남게 되었냐고 여쭤봤을 때 형이 대답하길 엄마랑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우리를 파출소에 데려갔는데 경찰이 형의 등에 밀양행이라는 글을 쓴 종이를 붙어서 버스를 태워줬어요. 버스를 타고 오는데 형이 내게 '등에 붙은 종이가 창피하니까 떼달라'고 해서 뗐어요.
집에 도착해 혼날까 봉창문 아래서 쪼그리고 울고 있는데, 갑자기 '형아! 형아!' 하는 막내동생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용기 내서 들어갔어요. 다들 부둥켜 안고 울고 했지요. 당시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예요.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세 형제는 밀양 인근의 고아원으로 갔어요. 나는 고아원에서 많이 도망쳐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그때마다 모르는 할머니, 아주머니들께서 밥도 주고 재워주신 적이 많았어요. 그러니 지옥 같은 고아원을 자주 도망쳐 나왔어요. 또 쥐약도 먹은 적 있어요. 고아원에서 너무 고통스럽고 학대를 많이 당해 당시 상황은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네요."
- 고아원 시절 무슨 일로 미국행을 꿈꾼 것일까요?
"고아원에 구제품이 있었어요. 구제품을 보니 크고 둥근 종이를 눌러 만든 통에 넣어져 왔는데 그 안에 미국의 잡지들도 있었고 신발은 세무로 만든 백설 공주의 난쟁이들이 신던 뽀족한 신발도 있었어요. 근데 짝이 맞는 게 거의 없었지요. 제대로 된 건 중간에서 다 빼돌려 팔아먹었어요. 그리고 미국 잡지들을 보니까 다른 세계가 있었고 책들의 종이가 아주 빛이 났고 천연색 칼라로 인쇄되어 있었어요.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미국은 잘 사는 나라구나! 미국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참! 내 인생은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어요.
그리고 가운데 사진은 2016년도 KBS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프로그램 촬영 당시 조선의용대 단체 사진을 내놓고 외삼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밀양 보훈처에서 2018년도 박차정 묘지를 재조성할 때 유족의 서류를 부탁해 의열기념관에 나오셨을 때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어머니한테는 뿌듯하고 감회가 깊었을 것입니다."
- 청소년 시절은 유생(한학자)분들께 공부도 배웠다면서요?
"청소년 시절에는 밀양 시골에서 약산 집안이라고 한학자 할아버지들도 많이 챙겨주셨어요. 붓글씨도 가르쳐 주시고 심지어 낚시도 배워 주시고 그랬어요. 자신들의 손자는 엄하게 하셨는데 저에겐 용돈도 주시고 그래서 벼루에 먹도 갈아드리고 무엇이든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다음은 내가 미국 생활에서 성공하여 노년에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족을 누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너무도 가난에 시달렸고 허덕이는 삶의 연속이었으니까요. 92년도 미국에 어머니를 초대했어요. 어머니는 한평생 약산 큰오빠로 인하여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으면서 지켜온 세월에 밝은 빛이었을 겁니다. 2008년 6월 20일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깊은 감회를 받으셨어요. 개관식 이후 1년에 한두 번 정도 '약산 흉상을 참배'하셨어요. 그 후 2018년 3월 7일 '의열기념관 개관식' 때도 인터뷰도 하고 약산의 생가터에 기념관이 들어서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회에 젖었던 적도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