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의 외조카가 학생들의 항일역사탐방 후원한 까닭

[다시 만날 그날까지 30화] 약산 김원봉 외조카 김태영 (2부)

등록 2024.08.01 10:23수정 2024.08.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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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14년 북경 모 식당에서 김태영 모습

2014년 북경 모 식당에서 김태영 모습 ⓒ 김영희

- 어머니가 평생 약산 집안에 대하여 함구하고 살다가 언제쯤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까?
"아! 그러니까 그동안 약산 외삼촌이 싫었어요. 약산으로 인하여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저 역시 모진 고생을 했기에 싫어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김학봉)가 도올 김용옥 선생과 인터뷰를 하면서 어머니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했어요."

- 어머니가 회장님이 미국에서 성공한 것 보고 뭐라고 하셨나요?
"외할머니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신 듯 어머니께 태영이 절대 건드리지 말고 곱게 잘 키우라고 늘 말씀하셨답니다. 태영이가 집안을 일으키고 노후를 편하게 만들 거라고 하하하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믿고 있었어요. 어머니 생각하면 외할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외할머니 등이 내 마음의 안식처였으니까요. 지금까지도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산소 옆에 외할머니 산소가 있습니다. 그쪽을 보기만 해도 그리움과 울분이 가슴을 칩니다. 돌아가신 네 분의 외삼촌 중 세 분이 당신을 낳으셨으니까요."

- 어머니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일까요?
"그래도 1945년 해방 후 약산이 환국했을 때였을 겁니다. 외삼촌의 환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과 애환이 섞여 있었을 겁니다. 당시 어머니가 6학년 때였어요. 밀양시민들과 전국 청년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환영식을 하는데 27년간 독립운동하다가 돌아왔으니 너무 좋고 뛸 뜻이 기뻐서 외삼촌 연설을 듣고 싶어 나갔답니다. 외삼촌은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지만, 한 번도 잡히지 않았어요. 변장술이 뛰어났대요. 외삼촌은 신체에 특징이 있었는데 머리 뒤 꼭지에 동전만한 하얀 점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유심히 살펴보았대요."

a  (좌)1960년대 형과 동생 아랫줄 오른쪽 김태영, (중) 2016년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약산 김원봉' 편의 한 장면, (우) 2018년 11월 의열기념관에서 생전 마지막 모습. 사진 제공 김태영.

(좌)1960년대 형과 동생 아랫줄 오른쪽 김태영, (중) 2016년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약산 김원봉' 편의 한 장면, (우) 2018년 11월 의열기념관에서 생전 마지막 모습. 사진 제공 김태영. ⓒ 김영희

- 이 사진들에 사연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왼쪽 사진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연인데요. 아주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4살 때 마산 고아원에서 숟가락도 없이 조개껍질로 죽을 떠먹고 그랬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형과 고아원을 도망 나와 무작정 걷다가, 혼자 구멍가게를 하는 고마운 할머니를 만났어요. 우리를 씻겨주고 밥도 주었어요. 할머니가 어떻게 너희들만 남게 되었냐고 여쭤봤을 때 형이 대답하길 엄마랑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우리를 파출소에 데려갔는데 경찰이 형의 등에 밀양행이라는 글을 쓴 종이를 붙어서 버스를 태워줬어요. 버스를 타고 오는데 형이 내게 '등에 붙은 종이가 창피하니까 떼달라'고 해서 뗐어요.

집에 도착해 혼날까 봉창문 아래서 쪼그리고 울고 있는데, 갑자기 '형아! 형아!' 하는 막내동생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용기 내서 들어갔어요. 다들 부둥켜 안고 울고 했지요. 당시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예요.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세 형제는 밀양 인근의 고아원으로 갔어요. 나는 고아원에서 많이 도망쳐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그때마다 모르는 할머니, 아주머니들께서 밥도 주고 재워주신 적이 많았어요. 그러니 지옥 같은 고아원을 자주 도망쳐 나왔어요. 또 쥐약도 먹은 적 있어요. 고아원에서 너무 고통스럽고 학대를 많이 당해 당시 상황은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네요."

- 고아원 시절 무슨 일로 미국행을 꿈꾼 것일까요?
"고아원에 구제품이 있었어요. 구제품을 보니 크고 둥근 종이를 눌러 만든 통에 넣어져 왔는데 그 안에 미국의 잡지들도 있었고 신발은 세무로 만든 백설 공주의 난쟁이들이 신던 뽀족한 신발도 있었어요. 근데 짝이 맞는 게 거의 없었지요. 제대로 된 건 중간에서 다 빼돌려 팔아먹었어요. 그리고 미국 잡지들을 보니까 다른 세계가 있었고 책들의 종이가 아주 빛이 났고 천연색 칼라로 인쇄되어 있었어요.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미국은 잘 사는 나라구나! 미국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참! 내 인생은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어요.

그리고 가운데 사진은 2016년도 KBS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프로그램 촬영 당시 조선의용대 단체 사진을 내놓고 외삼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밀양 보훈처에서 2018년도 박차정 묘지를 재조성할 때 유족의 서류를 부탁해 의열기념관에 나오셨을 때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어머니한테는 뿌듯하고 감회가 깊었을 것입니다."


- 청소년 시절은 유생(한학자)분들께 공부도 배웠다면서요?
"청소년 시절에는 밀양 시골에서 약산 집안이라고 한학자 할아버지들도 많이 챙겨주셨어요. 붓글씨도 가르쳐 주시고 심지어 낚시도 배워 주시고 그랬어요. 자신들의 손자는 엄하게 하셨는데 저에겐 용돈도 주시고 그래서 벼루에 먹도 갈아드리고 무엇이든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다음은 내가 미국 생활에서 성공하여 노년에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족을 누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너무도 가난에 시달렸고 허덕이는 삶의 연속이었으니까요. 92년도 미국에 어머니를 초대했어요. 어머니는 한평생 약산 큰오빠로 인하여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으면서 지켜온 세월에 밝은 빛이었을 겁니다. 2008년 6월 20일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깊은 감회를 받으셨어요. 개관식 이후 1년에 한두 번 정도 '약산 흉상을 참배'하셨어요. 그 후 2018년 3월 7일 '의열기념관 개관식' 때도 인터뷰도 하고 약산의 생가터에 기념관이 들어서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회에 젖었던 적도 있었어요."


a  어머니를 1992년 미국 집으로 초청했을 때 가족사진.

어머니를 1992년 미국 집으로 초청했을 때 가족사진. ⓒ 김영희

- 회장님 본인의 사업 성공 비결이 있습니까?
"나의 사업하는 방법은 직원을 많이 채용하고 임금과 보너스도 많이 주었어요. 직원들이 좋은 차와 안락하고 편안한 집이 필수라고 생각했어요. 직원들에 대한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배려했어요. 그러니 직원들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지요. 즉 내 일 같이 일하니 회사 운영이 안 될 수가 없지요. 특히 직원들에게 임금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평가했어요. 또 하나 나의 철칙이 사업을 학문적으로 운영을 했으며 사업 운영 방법을 컨설팅하면서 성공 계기를 마련하였어요. 그러니 1년 매출액이 2000억 원씩 되었어요. 하하하!"

- 한국에는 언제 나오셨습니까?
"그러니까 미국 들어가서 25년 만에 귀국했어요. 제일 먼저 어머니를 뵙고 약산 장학회 관계자들을 만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차마 할머니 묘소는 가지 못했어요. 미국에 있을 땐 한국 가면 외할머니 묘소에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질 못했어요. 묘소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오곤 했어요. 분노와 처절했던 과거의 기억에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갔을 때의 그 통곡의 날들도 생각났고 복수심을 억제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 약산 장학회와 여러 단체의 후원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하여 경제적 여유도 생겼고 무엇보다 국내 정세와 약산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완화되어 재평가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약산의 항일독립운동을 후손에게 기리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 끝에 여러 단체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2013년 EBS <기획 특집-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8부 '밀양아리랑' 편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후원을 결심하게 됩니다."

- 후원한 단체가 어느 정도 됩니까?
"꽤 되지요. 약산 장학회, '2012년도 북경대 한국대학원생 유학생회 항일 역사탐방 지원', 밀양독립운동연구소(아래 밀독연) 극단 밀양, 약산기념사업회(2015년도), 2019년 약산김원봉 기념사업회 창립식 행사, 성공회대 연구비용 등 후원했으며 약산을 좋아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믿고 후원금 전했습니다."

그간 후원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2013년 '중국 북경대학교 한국대학원생 유학생회 항일 역사 탐방(4회)' 지원

2013년 7월 북경대 유학생회에서 화북성 한단시 성문촌의 태항산 십자령∙장자령은 1942년 5월 일본군과 팔로군 그리고 조선의용군이 힘을 합해 싸운 최대의 격전지이다. 팔로군의 통로를 열어주기 위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윤세주, 진광화 등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투지역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대의 희생을 통해 등소평, 팽덕회 등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들이 도피할 수 있었으며, 훗날 지금의 중국 설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윤세주와 진광화는 중국 화북 국립묘지진기로예열사능원에 안장되어 중국 정부에서 인정받는 독립운동 전사자로 예우받고 있다.

a  2013년 북경대학 한?중대학원생 역사 탐방 화북성 한단시 석문촌 진광화, 윤세주 초장 묘지 앞에서 가운데 김태영 회장이 함께함(사진제공:정원식)

2013년 북경대학 한?중대학원생 역사 탐방 화북성 한단시 석문촌 진광화, 윤세주 초장 묘지 앞에서 가운데 김태영 회장이 함께함(사진제공:정원식) ⓒ 김영희


a  (좌) 조선군정학교 및 조선의용군 총본부가 있던 곳 남장촌 어린이들과 김태영, 정원식과 함께. (우) 조선의용대 약산의 부하 중 무명 열사 묘지 앞에서 김태영 큰절 올리는 모습 (사진제공:정원식)

(좌) 조선군정학교 및 조선의용군 총본부가 있던 곳 남장촌 어린이들과 김태영, 정원식과 함께. (우) 조선의용대 약산의 부하 중 무명 열사 묘지 앞에서 김태영 큰절 올리는 모습 (사진제공:정원식) ⓒ 김영희

김태영 회장은 2013년 북경대 4회차 역사 탐방에 함께하였다. 김 회장은 무명 열사 묘지에 절을 올리는 것 그 자체만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장촌 주민들의 사연을 들어보니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자세히 알고 기억하고 있었다. 중일전쟁으로 용감하게 전사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묻어주었고 지금도 주민들이 묘지 관리를 하고 있단다.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이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중 중국군과 연합하여 싸우다 전사했기에 기린다고 했다. 그 보답으로 답사팀은 마을 주민께 무명용사 묘지 관리에 고마운 마음으로 금일봉을 드리고 오곤 했다.

둘째, '조선의용대군(주1)의 투쟁지' 탐방 지원
탐방1) 약산 장학회∙석정 윤세주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역사 탐방 '약산과 석정 그리고 우리'

필자는 2014년 1월 4일 상하이, 홍커우공원, 남경천령사, 남경대학살 기념관, 남경대학, 우한, 태항산한단시, 남장촌조선군정학교, 오지산, 마전, 중원촌, 석문촌, 한단시 국립묘지, 호가장 전투지역 등 다녀왔다. 탐방팀은 전국 역사 교사들과 서울대학교 문과대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탐방팀은 마지막 날 북경에 도착했는데 김태영 회장이 탐방팀을 만나기 위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미국에서 북경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필자는 그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도 북경에 거주하였기에 함께 만나게 되었다. 이덕남 여사는 시아버지 신채호 선생이 국적도 없는 상태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끝내 국적 취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탐방1를 쓰다 보니 탐방2 때 감동적인 장면이 기억나서 소개하고자 한다.

a  (좌)왼쪽부터 2014년 12월 북경 모 식당에서 김태영 회장이 답사팀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우)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북경 거주)와 김태영 마완근과 함께. (사진제공:마완근)

(좌)왼쪽부터 2014년 12월 북경 모 식당에서 김태영 회장이 답사팀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우)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북경 거주)와 김태영 마완근과 함께. (사진제공:마완근) ⓒ 김영희


a  (좌) 김태영 회장이 답사팀에게 소개하는 자리(앞줄 세 번째 필자), (우) 답사팀이 조선혁명군정간부학교(주2)3기생 수학했던 곳을 둘러보는 모습 현재 천령사 절로 이용함, 교장은 약산

(좌) 김태영 회장이 답사팀에게 소개하는 자리(앞줄 세 번째 필자), (우) 답사팀이 조선혁명군정간부학교(주2)3기생 수학했던 곳을 둘러보는 모습 현재 천령사 절로 이용함, 교장은 약산 ⓒ 김영희

[각주]

(주1)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좌익단체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만든 연합성격의 항일민족연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창설한 관내 지역 무장 독립운동단체.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부터 40년대까지 관내지역 국민당 관할지역과 적구 지역에서 국민혁명군과 함께 군사활동을 벌인다. 조선의용대의 항일활동은 대체로 무한시기, 계림시기, 중경시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시기 중경으로 본부를 옮긴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부터 6월까지 낙양에 결집했던 제1, 3 혼성부대와 전위동맹 계열 제2지대가 무장항일전선 활동을 위해 화북지역으로 넘어간다.

(주2) 1932년 10.20 조선혁명군정간부학교 개교(26명) 교장: 김원봉(金元鳳)이었고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조직의 강화와 민족해방운동에 필요한 전위혁명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정치 교육기관. 명목은 중국 청년 간부를 훈련시키는 학교였지만, 사실상의 모든 교육은 의열단의 자체적 판단 아래 진행되어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이후 1935년 민족혁명당이 조직되면서 의열단과 함께 해체되었다. 독립운동가 중 광주 출신인 정율성 장군이자 음악가, 석정 윤세주, 이육사 등 총 3기생까지 125명을 배출했다.

*31화 김태영 편 3부가 계속됩니다.

a  작가 명함

작가 명함 ⓒ 김영희

덧붙이는 글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 발굴 조사단장∙봉사자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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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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