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민주노총 선전홍보실장으로 대의원대회에서 확정된 사업계획(안) 설명회를 하고 있는 라기주.
라기주
2남 5녀 중 막내였던 라기주는 부모님과 누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라기주의 말을 빌리면 "누님들의 치마폭에 싸여" 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라기주는 혹독한 대학시절을 보내던 중 입대를 한다. 제대 후 남은 학업을 마치고 1987년에 졸업을 했다. 당시에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면 중등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자격증을 받으려면 교생실습을 가야 했다. 광주동신중학교로 교생실습을 갔다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국어 과목 실습을 했어요. 연애할 때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갖고 가서 아이들에게 보여줬어요. 그 편지가 보통 편지가 아니었거든요. 두루마기 편지였어요. 펼치면 교실 앞문 입구에서부터 뒷문까지 쭉 이어지는 A4 용지 수십 장을 붙인 편지였어요. 학생들이 놀랐죠. 지도 교사도 놀라면서 저한테 '선생님 같은 분이 진짜 선생님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웃음)."교생실습을 가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여자친구가 쓴 편지를 보여주는 산교육을 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낸 주인공과는 장문의 편지를 받은 얼마 뒤,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헤어진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라기주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아픈 연애가 끝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할 즈음 라기주는 예비 아내에게 말했다.
"사랑 때문에 아프거나 절망하거나 슬퍼해 보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때문에 슬펐던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 겁니다. 나의 과거사 때문에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기주는 중등교사 자격을 얻었지만 교사의 길로 가지 않기로 했다. 평범한 회사에 입사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처음 입사한 곳은 어린이 책을 주로 만드는 삼성당 출판사였다. 출근해 보니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도살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조를 만들기로 했다. 노조를 만들자마자 회사는 탄압을 했다. 조합원 전원이 해고되었다. 삼성당 노조 위원장을 맡았다. 다음 해에는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가 생겼고 사무차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라기주는 노동조합 활동을 생업으로 이어 간다.
"사실 저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때론 몽환적이기도 하고요. 길을 걷다가 하수구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도 '아, 저건 하수구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아냐. 산골짜기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살았는데 조직생활을 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애써 외면했고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보았어요. 내가 생각했던 낭만, 시로 배운 낭만이 아니라, 밑바닥 사람들이 보였어요. 잃은 것은 '낭만'이고 얻은 것은 '사상'이에요(웃음)."낭만을 잃은 라기주는 '시'를 그만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남들은 잡혀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죽는데 내가 시를 써? 시 쓴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자괴감이 들어서다.
2021년 12월, 라기주는 민주노총 선전홍보실 일을 끝으로 은퇴를 했다. 2022년에 우연히 민족작가연합에서 노동자문예학교를 연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해 3월에 개강하는 제1회 노동자문예학교를 수강하고 4월에 수료를 했다. 민족작가연합은 노동시, 민중시, 통일시를 주로 쓰는 곳이다. 1년에 두 번 <민족작가>라는 문예지를 낸다. 라기주는 2022년 여름호에 '고백'이라는 시를 써서 신인상을 받았다. 공식적인 등단인 셈이다. '고백'에는 라기주가 절필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고백친일문학을 했다는 서정주의 글에 침을 카악 뱉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미당 서정주와 얼마나 다를까나도 미당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미당처럼 적당히 부역하고 영달을 꾀했을까 명예롭게 양심을 지켜 일제의 유혹과 만행에 맞서 싸웠을까내가 80년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 시 쓰기를 포기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친 것은 나는 절대 윤동주나 김남주 같은 시인이 될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였다그들처럼 불의한 시대에 맞서 올곧은 시를 쓸 자신이 없었다훗날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시대에 역행하여 노동자 민중을 짓밟고 탄압한 정권과 자본에 대해 미일 제국주의에 대해 찍소리도 못한 소위 어용시인이라는 낙인이 두려웠다총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 용기도 없었지만 권력의 눈치를 보아가며 자주 민주 통일에 역행하는 시를 쓴다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다포탄이 난무하는 그래서 산야가 초토화 되고 민주주의 파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민중이 고통 받고 있는데산업현장에서 생존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자본의 탐욕과 수탈 착취로 죽음을 강요 당하고 있는데저항하고 투쟁하지는 못할 망정 삼천리 금수강산을 노래하고 산업평화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을 쓸 수는 없었다조국이 두 나라로 쪼개져 오도가도 못하는데 총질을 해대고 미사일 핵폭탄으로 전쟁의 위기를 부추키는데 구시대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살아 노동자 민중 지식인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외면하고 방관하고 있는데 내게 미당의 친일본 반민족시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대놓고 싸우지 않고 단지 부역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변절하지 않은 시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오늘도 원고지 위에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조국통일 완성'이라 써놓고 한 글자도 더 써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