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대 남명학관에 있는 남명 조신 선생 흉상.
이우기
남명이 지리산 밑에 둥지를 틀고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즈음 인근에는 퇴계 이황이 역시 출사를 중단하고 낙향하여 고고한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다. 1501년의 동갑이고 생활권이 비슷한 데다 서로간에 소식을 익히 듣고 있었으나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몇 차례 인편으로 서찰만 주고 받았을 뿐이다. 세간에서는 퇴계를 경상우도, 남명을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큰 학자로 꼽았다.
퇴계의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남명의 철학은 보다 실천적이었다. 하여 임진왜란 당시 남명 문하에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고, 강직한 제자들이 많아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잇따른 상소 등으로 크게 탄압을 받게 되었다.
남명은 숨지기 전 자신이 수양하는 데 쓰던 방울은 제자 김우옹에게, 칼은 역시 제자 정인홍에게 넘겨 주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이 그를 정적으로 몰아 처형하였다.
선조 4년인 1572년 남명의 나이 72살에 이르러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제자들이 "혹시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땅히 어떤 칭호를 써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남명은 망설이지 않고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옳겠다"라고 답했다.
남명은 '처사', 곧 벼슬을 멀리한 재야지식인이다. 퇴계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 남명에게 벼슬을 추천하자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을 이유로 댔다. 누구 못지 않는 경륜과 식견을 갖고 총명했던 그였다.
'처사'로서 평생을 분방하게 살아온 남명은 1572년 2월 8일 제자들에게 '경(敬)·의(義)'의 중요성을 거듭 상기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조가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했으나 고인은 결코 사후의 큰 감투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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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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