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영제천 한수면 출신의 이구영. 이구영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의병운동의 지도자였다.
오마이뉴스
4명에 사형 언도
"작년 10월 인민항쟁의 일환인 충주인민항쟁 검거자에 대한 특별군정재판은 거월(1947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한다. 사형: 김용환, 이정, 신재식, 유영태(이상 부평형무소 수감) 무기징역: 한기봉, 박희철, 송현기(이상은 당일 청주형무소 수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의 1946년 10월 항쟁 주도자 선고공판에 관한 기사다(<민중주보> 1947.5.9.).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와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 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돼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 항쟁은 대구·경북을 시발로 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땅끝마을 해남에서의 추수봉기와 충북 영동에서의 영동경찰서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충주에서는 10월 들어 약 2주일 동안 항쟁이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도시 지역에서 시작해 면 단위로 확대됐다. 충주 10월 항쟁은 좌익계열 지식인, 활동가, 지역 명망가, 공장과 광산노동자, 지역주민이 하나가 돼 참가했다.
충주 10월 항쟁의 단초는 9월의 경찰과 우익의 테러였다. 9월 24일 우익이 좌익 진영의 간판을 모두 파괴했다. 9월 25일에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을 파괴했고, 숙직원을 납치 구타했다.
9월 26일에는 오후 10시 반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우익들에 대해 자위단원들이 반격하려 하자 경찰관이 나타나 자위단원만 체포했다. 경찰과 우익은 주택과 가구를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했다. 또한 좌익 동조자라는 이유로 의사 1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10월 2일에는 장날을 이용해 독립촉성국민회 주최로 청년 궐기대회를 개최한 뒤 오후 8시 만취한 상태로 좌익에 대한 테러를 강행했다. 계속된 우익과 경찰의 테러는 10월 초 대규모 민중봉기로 폭발했고 확산됐다.
10월 8일에는 용산동 방면에서 시내로 진출하려는 시민들과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이 희락목욕탕(성내동 399번지) 부근에서 충돌하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관 사망 사건 이후 경찰과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아래 독청)은 충주 각지에서 파괴 행위를 감행했고, 부녀자의 머리를 자르는 등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전홍식,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 2021 / 심지연, <대구10월항쟁 연구>, 1991).
충주 10월 항쟁 주모자는 충주경찰서에 검거돼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구속한 면한 이들 중 일부가 월악산에 입산했다. 이것이 월악산 빨치산의 시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