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시가 적힌 안내문두편의 시는 이곳 산천재에 터를 잡고 난 후의 심정을 적고있다.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복거(德山卜居)란 제목이다.
김진수
그가 58살 이전에 지리산을 10차례 이상 유람한 이유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한 것이라면 어찌 번거로운 산행을 꺼리지 않았겠는가? 평생 동안 품고 있던 계획인, 화산(華山, 중국의 5대산 중 하나)의 한 모퉁이를 빌어 일생을 마칠 곳으로 삼으려 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 속에 살 수 없음을 알고, 서성거리며 돌아보고 안타까워하다가 눈물 흘리며 나온 것이 10번이었다. (주석 4)
남명이 벼슬을 거부하고 시골에 칩거하다가 다시 지리산 산중으로 은신한 데는 산을 특히 지리산을 좋아하는 기본 심리와 함께 당시 조선사회의 패악 그리고 가족사의 아픔도 작용했을 것이다. 을사사화로 절친이었던 이림·성우·곽순·이치 등이 화를 당하고 정미사화로 사림의 영수어자 절친이었던 송인수가 처형되었다. 여기에 어머니의 3년상, 아들의 요절, 부인의 병환 등 가정적으로 불우가 겹쳤다.
남명이 덕산으로 이사를 간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덕산복거>라는 시와 '산천재(山天齋)'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서 찾았다. 그가 61살에 삼가에서 덕산으로 이사를 한 이유는, 지리산에 은거하겠다는 오랜 염원, 부당한 정권과의 거리두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천왕봉 때문이다.
남명은 자신의 도를 몸으로 실험하기 위해 그 도반을 택했고, 결국 천왕봉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남명과 지리산의 진정한 만남이었다. 그 전까지의 만남이 피아(彼我)의 만남이었다면, 이때의 만남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만남이었다. (주석 5)
지리산을 읊은 많은 시 중 두 편을 소개한다.
봄바람 부는 삼월 무릉으로 돌아오니
냇물 속의 맑은 하늘 수면도 넓어라
한 번 유람 내 분수에 넘친 것은 아니나
인간 세상 유람하기 또한 응당 어렵구나. (주석 6)
덕산 산 아래에 덕천촌이란 마을 있는데
들어가는 이들 모두 입덕문을 경유하네
속인들 덕(德)자로 이름 지은 뜻 모르리니
부질없이 산수를 가져다 사람들에게 말하네. (주석 7)
주석
1> 최석기, <남명과 지리산>, 45쪽, 경인문화사, 2006.
2> 앞의 책, 56쪽.
3> 앞과 같음.
4> <남명집> 권2.
5> 최석기, 앞의 책, 20~21쪽.
6> 앞의 책, 70쪽.
7> 앞의 책,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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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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