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이 직접 심은 산천재 뜰에 있는 남명매(南冥梅)
김종신
남명이 대왕대비를 궁궐 속의 한 과부, 군주를 고아라고 비판했을 때 사관은 실록에 이렇게 썼다.
당시 유일(遺逸)에 기탁하여 실제 학덕은 갖추지 않고 한갓 허명으로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조식은 몸을 바르게 지키고 깨끗함을 보존하며 초야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초가 절로 향기를 풍기듯이,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안빈자락하여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도다. 그러나 조식은 세상을 결코 잊지 않았다. (주석 5)
남명은 '폭군방벌론'까지는 아니었지만, 조선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처럼 '군주 무오류'의 신봉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미 <민암론>에서 제기했듯이, 민의에 배치하는 군왕을 퇴치하는 것이 유학의 기본 정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국가원수에 관해서, 임금된 자는 성인은 못되더라도 현인은 되어야 하고, 정의를 지키고 또 설령 통솔 능력은 없더라도 적어도 측근 참견자들의 간섭이라도 물리치고 독립적으로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만큼도 못한다면 별수 없이 백성이 왕을 축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주석 6)
당시에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게 근본을 두지 못하여 민심과 천의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소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권과 왕위 자체를 비판한 죽음을 무릅쓴 직언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유교국가에서 민심이 떠나고 천의가 옮겨졌다면 혁명을 해도 가하고, 그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정치사상에서 민심의 향배는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당시 민중이 어육이 된 현실을 직재하게 비판한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핵심을 거론한 것이 된다. (주석 7)
돌이켜보면, 남명은 주자 성리학의 교조적 권위가 극성일 때의 인물이다. 여차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가문이 폐족되는 상황에서 거침없이 할 말을 하고 굽힘없이 살았다. 제자에게 준 칼의 자루에 새긴 오언절구는 곧 자화상이다.
불 속에서 하얀 칼날 뽑아내서
서리 같은 빛 달에까지 닿아 흐르네
견우 북두 떠 있는 넓디 넓은 하늘에
정신은 놀되 칼날은 놀지 않는다. (주석 8)
'칼 찬 유학자'라 하여 인정이 메마른 냉혈인으로 연상할지 모르지만, 지극히 따뜻하고 풍자에 능숙한 온혈인이었다. 상국 이양원이 어느날 산천재를 찾아 왔다. 허리에 칼을 찬 모습을 보고, "칼이 무겁지 않습니까." 의례적인 인사였을 것이다. 이에 "뭐가 무겁겠소. 내가 보기에는 상국의 허리에 매단 금대(金帶)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 (주석 9)
남명의 '경'과 '의'의 정신은 이후 백호 윤휴, 허균, 한말의 매천 황현, 면암 최익현, 단재 신채호로 승계되는 민족사의 정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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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김충열, 앞의 책, 100쪽.
2> 이익, <백두정간(白頭正幹)>, <새설(僿說)>, 권1, 천지간.
3> 이종목, <남명 조식의 삶과 문학>,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201쪽, 청계출판사, 2001.
4> 앞의 책, 93쪽.
5> <경종실록> 전 19.
6> 조추환, <남명의 정치사상>, <남명학 연구논총 제1집>, 268~269쪽.
7> <남명 조식선생>, 112쪽, 경상남도, 2001.
8> <국역 남명집>.
9> 한형조, <남명, 칼을 찬 유학자>, <남명조식>, 앞의 책,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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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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