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의 '매창뜸' 시비가람 이병기 선생의 '매창뜸' 시비
오승준
시조는 왕조시대 주로 사대부들이 즐겨 부른 노래형식이지만, 양반의 언저리에 있었던 기녀들도 이러한 시조를 향유하는 층에 들게 되었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중인이나 평민층에서 주요한 작품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시조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즐기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따져 보아도 고려 중엽에 형성되어 근 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창작되고 애송되어 우리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라 할 만하다.
시조가 처음부터 이 이름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이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短歌)·시여(詩餘)·신번(新飜)·장단가·신조(新調) 등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쓰였다. '시조'라는 명칭은 '시절가조'라는 말의 약칭으로 당대에 유행된 곡조란 뜻이 담겼다. 이런 이름이 문헌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영조 때 시인 신광수가 쓴 <관서악부(關西樂府)>이다. 이 책에 가객 이세춘이 시조의 장단을 가장 잘 불렀다는 말이 나온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는 원래 음악적 용어로 쓰였다. 그러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문학의 영향으로 과거에 없던 문학류 즉 창가, 신체시, 자유시 등이 나타나면서 이것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 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의 한 명칭으로 빌려 쓰게 된 것이다.
시조는 형식적으로 초장, 중장, 종장의 3장으로 이루어진다. 모두 합해서 45음절 안팎의 짧은 정형시이다. 우리의 전통적 시가는 기본적으로 3·4조(또는 4·4조)의 음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기본형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적인 기준이고, 우리말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신축성이 어느 정도 허용되고 있다.
초기 시조를 읊는 집단은 유학적 교양을 갖춘 사대부들이었다. 한시의 단아한 형식 속에서 문학적 교양을 쌓은 이들 사대부들이 자신의 심정을 한문으로만 풀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조의 짧은 형식은 이런 요구에 잘 부응하는 것이었다. 초장과 중장에서 외부 사물로부터 빚어진 정황을 읊은 다음, 종장에서 이를 단번에 아우르는 주관적 정서를 담아 냄으로써, 수다스럽지 않게 자신의 세계를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형 시조만으로 억누를 길 없는 정서를 모두 담아 낼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여러 편의 시조를 하나의 제목 안에 수용하는 연시조를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나 윤선도의 <어부사시가>등이 이런 연시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애초에 양반의 문학이었던 시조는 그 언저리에 기생들이 시조의 창작과 음송에 참여하면서 시조를 즐기는 계층도 다양하게 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 평민들의 현실인식이 성장하면서 이들도 적극적인 향유자로 참여하게 된다. 특히 평민들은 규범화된 형식 속에 그들이 지닌 자유로운 현실 의식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전혀 낯선 형힉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사설 시조이다. 사설 시조는 중장에서 기존의 음수율이 가진 제한을 마음껏 뛰어넘고 있다.
이러한 파격은 시조의 내용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양반들의 시조가 음풍영월이나 충절, 도학적 세계관을 관념적으로 담아 낸 것에 비해, 이러한 도덕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평민들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흔히 부딪히는 구체적인 세계의 모습, 예컨대 진솔한 사랑이나 왜곡된 현실을 자신들의 독특한 목소리로 담아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세계는 여전히 양반들의 주자학적 세계관 속에서 수용된 것이었다. 이런 한계가 사설 시조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 공격이 아닌 풍자와 골계를 통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실 비판의식은 실학 정신과 결부되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할 것이다.
시조가 부흥을 이루게 되는 계기는 의외로 고려의 멸망과 세조의 왕위 찬탈. 그리고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이루어진 중인 계층의 두드러진 부상 때문이다. 전자의 두 요소는, 시조가 영탄과 충절의 마음을 표현해 내는 데에 적절한 양식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시조를 읊는 계층이 양반 계층에서 평민으로 확대되자, 시조를 가칭하는 무리가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고, 시조의 체계적인 정리도 이루어져 시조집의 편찬이 폭 넓게 이루어졌다.
다른 전통 문학 양식들이 근대 개화기 이후 사라지게 되었지만, 시조는 현대적으로 변용되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학으로 남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 '시조문학의 큰 별'인 가람 선생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