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묻혀 흐지부지 사라지기 일쑤였던 엄마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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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과 손주들이 온다고 이것저것 준비해둔 명절 음식이 곧 생일상이 되고, 내가 비좁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기 바쁜 엄마를 물리치고 맛도 보장되지 않는 미역국을 굳이 끓여주겠다고 하기 머쓱하여 주저하다 보면, 어느새 미역국도 엄마가 끓여서 내놓는다.
가끔 내가 생일 케이크를 사서 초에 불을 켜지만, 그것도 손주들의 촛불 끄기 놀이가 되어 그날의 주인공을 알 수 없게 되곤 한다. 지난해 생일도 그랬다. 나는 조카들이랑 놀아준다고 상차림을 돕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상을 차려준 사람이자 그날의 주인공인 엄마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 게 식사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어서 앉아서 같이 먹자는 내 말에도 엄마는 여전히 주방을 오가며 "나 신경 쓰지 말고 느이들 먼저 먹어"를 반복했다. 그리고 오빠와 두 조카, 내가 한 번에 앉자 의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엄마는 "나는 서서 먹어도 돼" 하면서 정말로 서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데다 그 옆에 별 생각도 없이 앉아 있는 오빠를 본 나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지 못해 오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와 이혼한 후 거의 혼자 생계를 책임지면서 말 그대로 돌봄밖에 모르고 산 엄마가 왜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식구들에게 화가 났다. 엄마는 "엄마 괜찮으니까 울지 말어. 엄마 앞에서 싸우지 말어" 하면서도 화장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다. "엄마, 엄마가 자꾸 괜찮다고만 하니까 식구들도 엄마 안 챙기고 당연하게 넘어가잖아. 엄마 스스로를 소중히 대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장 엄마를 돌봐야 했던 건 식구들이었다는 걸. 엄마는 과중한 '엄마 역할'에 대해 가부장 문화가 주는 압박에 충실해 왔을 뿐이라는 걸.
"꽃 보러 오라"는 이웃
올초 엄마는 몇 년 만에 내 자취방에 왔다. 본가에서 4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다. 그때 나는 이별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 시간에 한 번은 엉엉 울어야 그나마 살아지던 때였다는 변명을 붙여보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뿐이다.
나는 엄마를 대접하기는커녕 아침에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에게 나 지금 울어야 하니 나가 달라고 말했고, 말 한 마디에 예민해져 잔뜩 짜증을 냈다. 엄마는 우리집에 와서도 밥을 해주고, 장을 봐 와서 반찬을 몇 개나 만들어놓고 갔다.
같이 바다에 갔을 때 바다를 보며 소리 지르자고 말해 주었고, 수평선을 보면서 몰래 우는 내게 다가와 등을 쓸어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간 뒤 다시 울었다. 이별 때문이 아니라 엄마에게 한 번 웃어주지도 못한 나와, 여기까지 찾아와 작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엄마가 생각나 울었다.
집에 돌아간 엄마는 다음날 내게 스킨답서스 화분을 보내 주었다. 식물이라도 키워보면 마음이 나아질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다 희미해진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도 그 긴 아픔을 그렇게 흘려보낸 걸까. 돌볼 수 있는 것들을 돌보면서. 돌아보기보다 그저 돌보면서. 엄마의 화분들은 고통을 먹고 그렇게 예쁘게 자라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