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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 일하다가 아이디어, 그녀가 드릴 잡은 사연

[지금을 사는 여성들]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이야기

등록 2024.09.29 11:25수정 2024.09.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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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여권통문의 날'입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주축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제 폭력으로 여성이 죽고, 불법촬영이나 리벤지 포르노만으로 기가 막혔던 성범죄는 이제 딥페이크로 상상할 수 없던 선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당차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시대 지역 곳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조명합니다.[편집자말]
'집'은 우리에게 편안하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직접 집을 관리하거나 또는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편안한 집'과 '번거로운 작업'은 뗄 수 없음을 알 테다. 수명이 다한 전구와 헐거워진 방충망 교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새로 구매한 커튼 설치 따위가 그렇다. 특히 사회적으로 '기술'과 동떨어진 존재라 여겨져 온 '여성'에겐 이런 자잘한 관리 기술도 대단한 설비와 기능을 갖춰야만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잘한' 생활 기술임에도 말이다.

올해 초 이러한 주거관리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충북 옥천군이 운영하는 '신중년청춘대학'에 '주거관리기술학교' 강좌가 개설된 것이다. 6회에 걸쳐 진행된 주거관리기술학교에서 기술을 습득한 임미경(53, 옥천읍)씨를 만나 기술을 배우는 기쁨을 물었다.

주거관리에 대한 관심

a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 월간 옥이네


"이전엔 공인중개사로 일했어요. 업무 특성상 여러 집을 보러 다니면서 '이 집은 이런 색 벽지가 잘 어울리겠다, 여기엔 이런 포인트를 주면 더 예쁘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거죠."

10여 년 전 대전에서 공인중개사 일을 했던 미경씨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그저 묻어두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에서 업무를 확장, 직접 집을 구매해 리모델링과 인테리어를 시도했다. 전문 과정을 배우지 못한 탓에 온라인상에서 조언을 찾곤 했는데, 당시 그의 교재는 '블로그'였다.

"제일 뿌듯했던 작업은 옥상 방수 작업이에요. 14~15평 빌라 옥상 방수 견적을 맡겼는데, 120만 원이 필요하다더라고요. 20년 전이었는데도요. 너무 비싸서 블로그에서 방수하는 방법을 찾아 직접 해봤죠. 당시 대학생이던 막냇동생과 이틀을 작업해 완성했어요. 작업이 끝난 옥상을 둘러보곤 '이걸 정말 내가 했다고?' 싶었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전문가의 영역이라 생각한 기술을 시도해 완성한 경험은 미경씨에게 큰 성취감을 안겼다. 그런 그에게 주거관리기술학교는 그간의 '독학' 경험을 전문가에게 점검받으며 한 단계 더 수준을 끌어올릴 좋은 기회였을 테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강좌에는 남성 수강생(4명)보다 여성 수강생(11명)이 더 많았다는데, 주거관리 기술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여성들의 갈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이 수업을 들은 분들이 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아주 적극적으로 배우시더라고요. 요즘 저출산과 고령화로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잖아요. 이를 대비해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여성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적재적소에 맞는 도구 고르기

a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 월간 옥이네


주거관리기술학교는 총 6차시(▲주거관리 ∆세면대 및 변기 설치 ∆도어실린더 교체 및 백시멘트 활용 ∆타일 시공, ▲생활관리 ∆공구 사용법 ∆제품 수리, 수강생의 궁금증에 답해주는 ▲자유 수업 ∆방충망, LED 교체 등)로 진행됐는데, 미경씨의 흥미를 끈 건 생활관리 수업이었다.

"집에 망치, 드릴, 스패너 같은 기본 공구가 있어서 직접 사용해 본 적이 있어요. 다만 정확한 사용법은 모른 채였죠. 공구 사용법 수업 들으면서 상황별 사용하는 공구가 무엇인지, 어떤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배웠어요. 자주 사용하는 전동드릴로 박힌 나사를 빼거나 시멘트에도 박는 기능이 있는지 몰랐거든요. 이젠 알맞은 공구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게 됐죠."

여러 공구 중 미경씨가 애착이 가는 공구는 글루건이다. 특히 재활용이 어려운 옷을 재사용할 때 유용해 가장 마음에 든다고. 그는 "평소에도 물건을 고쳐 쓰고 재사용하는 것에 관심 있었는데, 이러한 활동이 개인과 가정뿐 아니라 사회와 지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듣고 매우 놀라기도 했다"며 "좋은 기술을 배웠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배운 바를 나눠주고 싶다"고 말했다.

주거관리기술학교는 상반기 수업을 마친 후 한 차례 봉사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8월 21일부터 11월 29일까지 진행될 하반기 강좌는 낮 시간대에서 저녁 시간대로 변경해 14명의 새로운 수강생과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문의 043-730-3746 행복교육과).

"지금을 열심히 배우는 시기로 정했어요"

a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주거관리기술학교 수강생 임미경씨. ⓒ 월간 옥이네


낯선 분야에 뛰어든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한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사실을 수용할 용기, 실수투성이임에도 시도해 볼 용기 같은 것 말이다. 미경씨가 배움의 장에 나설 수 있는 용기를 끌어온 저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는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후천적 노력으로 만들어 냈다"고.

"40대까지는 하고 싶은 게 떠올라도 행동으로 이어내는 게 겁이 났어요. 그런데 갱년기를 보내면서 앞으로의 삶을 지금과 같은 태도로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생 2막을 어떻게 꾸려갈지 고민하다가 50대 중반을 열심히 배우는 시기로 정했어요."

'배움엔 때가 있다'지만, 그 때를 만드는 건 숫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전하는 작은 결심이다. 미경씨는 옥천군에서 진행하는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에 참여한 주거관리기술학교뿐 아니라 목공, 서각, 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수업을 이미 이수했다고. 더불어 올해 초엔 충북도립대 제과제빵과 야간반에 등록해 밤늦게까지 도서관을 떠나지 않는 날이 늘었다.

"처음 참여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목공이었는데, 나무를 만지는 게 좋아 다음엔 서각 수업을, 글씨를 새기다 보니까 내 글씨를 더 멋지게 만들고 싶어서 캘리그라피를 배우게 됐어요. 한번 배움의 장소에 나가니 그 이후는 물꼬가 트이듯 새로운 배움의 장으로 연결된 거지요."

"50대 중반엔 여러 분야를 오가며 공부하고, 50대 후반부터는 전문성을 더해 다양한 직업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품은 미경씨.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배움의 한때를 보내는 중이다.

월간옥이네 통권 87호(2024년 9월호)
글‧사진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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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관리기술학교 #집 #충북옥천 #월간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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