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마도를 방문하고 나온 사진.
황광우
오늘(9월 17일)은 한가위 추석날이다. 나는 해남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장형 혜당 스님(황승우)이 해남읍에 살고 있고, 셋째 형 황지우 시인이 해남 현산면에 살고 있기 때문에 1년에 두 번은 해남에 간다. 예술은 '목적 없는 목적'이라 하는데,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을 보러 먼 길을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인듯 하다.
광주에서 나주, 영암을 거쳐 해남으로 가는 이 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가던 길이기도 하다. 월출산이 보이면 버스는 이내 해남으로 꺾어지는 길로 들어선다. 어머니의 고향, 해남은 언제나 푸근하다.
버스에서 내리고 마트에 들러 과일과 고기를 사는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의 하나다. 좋은 소고기를 듬뿍 사려고 하였으나 마트의 식품점에 소고기가 동이 나버렸다. 명절이라 택시 기사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내리니 해남읍을 한눈에 보고 있는 성불암이 나온다. 대문이 활짝 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생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한데, 널찍한 성불암 마당은 따사한 햇볕만이 내리쪼일 뿐 인기척이 없다.
나는 가만히 정자에 앉는다. 이 정적이 마음에 편하다. 뜰에는 깻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성불암 마당의 고요는 형수님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삼춘, 언제 왔어요?" 형수님은 미수에 접어든 형의 노후를 보살피고 있는 여인, 하늘이 내려준 보살이다.
"형님, 저 왔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넉 자를 새겨 넣은 편액이 형님의 거처 입구에 걸려 있다.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떠올리게 하는 역설의 지혜다. "형님 저 왔습니다." 열두 시가 다 됐는데도 형은 주무시고 있나 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형은 나왔는데, "애구, 이게 뭐예요, 옷을 거꾸로 입었잖아요" 하면서 형수님은 마치 아이 다루듯 옷을 갈아 입혀 준다.
젊은 시절엔 그 장대하던 형의 몸집이 이제는 낙엽 떨어진 나무처럼 쓸쓸해 보였다. "광우야, 보고 싶었다. 연락도 안 되고..." 언제부턴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자주 눈물을 훔치는 형이 보기에 안쓰럽다. 형(1938년 생)의 현재는 20년 후 나(1958년 생)의 미래다. 나도 20년 후에는 저처럼 될 것이다.
창가에 풍금이 있어 나는 형에게 풍금을 쳐보라고 부탁했다. "형은 기타도 잘 치고, 풍금도 잘 다루는데 누구한테 악기 연주를 배우셨나요?" 답이 뻔한 질문을 내가 드린 것은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 "이런 것을 누구한테 배운다냐?" 역시 답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형은 전자 풍금을 켜기 시작했다. "찾아갈 곳은 없다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은 남인수의 노래다. 형은 악보도 없이 잘도 연주하였다. 나는 <목포의 눈물>을 쳐달라고 부탁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는 황씨 형제들의 18번지 노래다.
"형님, 5.16 군사쿠테타 때 있잖아요. 그때 군인들한테 자전거를 빼앗기고, 군대에 입대했잖아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지야. 가난한 학생의 생계수단을 빼앗았으니..."
"아버지는 언제 폐결핵에 걸리셨나요?"
"글쎄..."
"못 먹어서, 영양실조 때문에 걸린 병이었죠?"
"그랬지야. 나도 군대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