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1국 군경 사건과 적대 사건 조사 결정 현황
진실화해위원회
2기 진화위처럼 4년 동안 조사 활동을 했던 1기 진화위와 비교해 보면, 1기 진화위는 조사 개시 후 3년 6개월이 지난 무렵인 2009년 하반기에 미군 사건을 포함한 민간인 집단희생 8,177건 중 5,875건(72%)을 종결하고 5,195건(전체 사건의 64%)을 진실규명으로 결정했으므로 군경 사건 분야에서는 2기 진화위의 실적이 훨씬 더 저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진화위는 적대 사건의 진실규명 비율이 군경 사건보다 월등히 높은 점과 관련해 "관련 기록을 찾기 쉽고 참고인 확보가 용이하다"고만 설명했다(한겨레 2024.7.11.). 그런데 MBC 등의 보도로는, 이 분야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1국의 황인수 국장이 2023년 10월 직원 대상 교육에서 "남한 쪽 만행 3개면 북한 쪽 만행 3개로 균형을 맞추라"고 하면서 군경 사건과 적대 사건 진실규명의 숫자적 균형을 맞춰 달라고 발언한 적 있다. 이처럼 조사1국장이 진화위에서 의결을 하기도 전에 미리 진실규명 결정 비율을 정해 놓고 조사하라는 말까지 한 상태라, 피해 유족들은 자신이 신청한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지 못하고 진화위 활동이 종료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필자는 2기 진화위의 군경 사건 진실규명 부진의 구체적 원인은 무엇인지, 다른 해결 방안이 없는지 2기 진화위에 근무했다가 퇴직한 조사관 몇 명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현미경 들여다 보듯이 희생 입증 증거 요구해
우선, 전 조사관들은 "2기 진화위는 1기 진화위 활동 후 10년이 지나 달라진 조사 여건을 반영해 희생 인정 기준을 달리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1기 진화위의 인정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도 어려운데, 갈수록 증거를 요구하는 수준이 높아지고 심의가 엄격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1기보다 요구하는 입증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
진화위의 진실 규명에 활용하는 자료는 문서 자료와 진술 자료로 나뉜다. 문서 자료는 경찰, 사법부 등 과거 가해 기관에서 생산한 문서, 피해자의 사망 신고 내용을 기록한 제적등본 등의 공적 자료가 있고, 족보, 신문 기사, 연구서 등 민간에서 작성한 문서도 있다.
그러나 군경 사건은 분단 반공 체제에서 오랫동안 기록이 은폐되거나 왜곡됐으므로 사건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적대 사건과 비교해 보면, 사건 현장에서 희생자의 시신 수습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제적등본이나 족보에 사망 일시와 장소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결국 진술로만 입증해야 하는 사건이 많다.
적대 사건보다 군경 사건에 더 까다로운 입증 기준 적용
그런데 2기 진화위는 적대 사건보다 군경 사건에 요구하는 희생 입증 수준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일례로 적대 사건에는 참고인 진술 없이 시신 수습 여부와 신청인 진술만으로도 희생자로 인증한 사례가 다수 있다('전남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학산면을 중심으로', '전남 장흥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대덕읍을 중심으로', '전남 장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북일면・북이면・북하면을 중심으로', '전남 장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2)' 등).
또 전 조사관들에 의하면, 참고인 진술을 인정해 주는 범위도 훨씬 넓다. "경산 박사리 사건은 상해 피해자들의 경우, 피해와 관련해 병원 기록 등 객관적으로 제시한 증거 자료가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지 않은 후손들과 마을 주민들의 전문 진술만으로 피해를 인정해 줬다. 적대 사건은 피해자의 손자뻘 되는 사람들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한 경우도 있다"라고 말한 조사관도 있다.
반면, 군경 사건은 "진실 규명 대상자의 시신을 찾았다 하더라도 복수의 참고인 진술을 요구했다. 목격 참고인을 어렵게 찾은 경우에도 그 1명의 진술만 있으면 인정하지 않으며, 전문 참고인의 경우 2명의 진술을 확보해도 인정하지 않은 사례가 허다했다", "위원회 상층부에서 신청인이나 참고인의 진술을 의심부터 하고 근래 발생한 형사 살인 사건처럼 검토했다"고 한다. 즉, 7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최근에 발생한 사건처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를 요구하므로, 참고인 진술이 있어도 진술만으로는 인정받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군경 사건 중에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처럼 마을에서 여러 명이 함께 끌려가 집단학살 당한 사건이 많다. 그러므로 1기 진화위 보고서 기록을 참고해 그 마을이나 지역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맥락을 파악해야 사건의 진위를 가릴 수 있다. 그런데 2기 진화위 상층부는 집단 학살을 부정하고 맥락을 무시하면서 각각의 사건을 '우연히'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개별화하여 다루면서, 개개인의 희생 사실만 미시적으로 들여다 보니 오히려 희생 입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같은 마을에서 함께 끌려가서 학살된 경우에도 족보 기록이 있으면 진실규명이 되고 그런 기록이 없으면 진실규명이 안 되는 일까지 생긴다고 한다.
이처럼 2기 진화위 상층부는 적대 사건은 쉽게 통과시키지만, 군경 사건에는 높은 입증 조건에 맞추기를 요구하고 입증 자료 부족을 이유로 소위원회나 전체위원회에서 안건을 상정하지 않거나 심의를 지연해 왔다고 한다. 조사관들은 개별 사건마다 증거를 있는 대로 찾으려고 발품을 팔았지만, 그렇게 조사해도 위원회 상층부의 결재를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군경 사건의 진실규명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기관 자료의 악용
2기 진화위의 군경 사건에 대한 편파성은 문서 자료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전국 각 경찰서에서는 한국전쟁 때 군경에게 피살된 사람의 가족을 사찰하기 위해 1980년대 초반까지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 <신원기록편람> 등의 자료를 작성했다. 1980년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경찰서에 지시한 <신원기록일제정비계획>에 의하면,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생존자와 가족의 '사상과 충성심'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1기 진화위는 이 자료들을 과거에 가해 행위를 했던 국가기관이 남긴 '불법 학살의 증거'라고 보고 희생자 확인을 위한 증거 자료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