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목 4.3 유적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의 모습
서부원
나머지 절반은 성산 일출봉 아래 터진목 유적지를 향했다. 하고 많은 곳 중에 터진목이 불현듯 떠오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학살당한 시신이 파도에 쓸려가는 주인공의 꿈 장면 말이다.
마을이나 들판, 하다못해 동굴에 갇힌 채 학살당했다면 이후 유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백사장이나 폭포 등 바닷가에서 처형된 경우엔 유실이 불가피했다. 제주도 곳곳에 '헛묘'를 조성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봉분만 있는 묘에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의 한은 감히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소설의 첫 장면은 한강 작가가 언젠가 찾아온 이곳 터진목 학살터에서 모티프를 얻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예나 지금이나 터진목에는 웬만한 집채도 집어삼킬 만한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오랜 세월 성산 일출봉의 산채를 수직 절벽으로 깎아낸 위용은 여전하다.
터진목은 성산 일출봉과 한라산이 자리한 제주도 본섬을 잇는 사주(沙柱) 지형으로 '터진 길목'이라는 뜻이다. 4.3 당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끌려와 공공연히 총살되었던 현장이다. 극악무도했던 서북청년단의 주둔지와 인접한 곳이어서 집단 학살이 빈번했다.
사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 읽어봤다는 아이는 없었다. 하긴 4.3에 대한 역사 지식과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읽기가 여간 만만찮은 작품이라 큰 기대는 없었다. 조만간 꼭 읽어보겠다는 다짐만으로도 기특했다.
간혹 올레길을 걷는 이들만 눈에 띌 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없었다. 주변은 잔뜩 찌푸린 하늘과 거칠 것 없이 불어오는 칼바람 소리에 스산한 풍경이었다. 좁쌀 굵기로 성기게 갈린 거뭇한 현무암 모래가 파도에 쓸려가는 소리까지 더해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성산 일출봉 방향의 도로변에는 운전자들을 향해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듯 동백꽃을 그린 타일 벽을 조성해 놓았고, 조촐한 기념물을 세우는 공사도 한창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올레길을 걸었다. 이곳은 올레길 1코스의 일부로, 총 22개의 올레길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