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리 얻기 위한 고민과 방황 시작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5]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의 근원을 찾아서

등록 2024.11.02 15:55수정 2024.11.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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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색에 잠긴 수운 최제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선생은 한 번 생각에 잠기면 바위처럼, 소나무처럼, 허공에 떠있는 구름처럼, 쉼 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그야말로 자연이 되고 하늘이 된다. 박홍규 화백은 수운 선생의 일생일대의 그림으로 삶을 조명하였다.
깊은 사색에 잠긴 수운 최제우 대신사수운 최제우 선생은 한 번 생각에 잠기면 바위처럼, 소나무처럼, 허공에 떠있는 구름처럼, 쉼 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그야말로 자연이 되고 하늘이 된다. 박홍규 화백은 수운 선생의 일생일대의 그림으로 삶을 조명하였다.박홍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수운 선생이 10세 되던 해 어머니 한씨가 환원한다. 당시 마흔으로 아들 제우와 7세의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근암공은 세 번째 부인마저 잃어야 하는 불운을 맞는다. 나이 열 살에 어머님을 잃어야 했던 최제우의 참담한 심정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어린 나이의 최제우와 여동생은 어머니를 잃고 몹시 슬퍼하였다.

어머니의 묘는 현재 수운 선생의 태묘가 있는 산줄기 남쪽 양지바른 곳에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사(生死)를 비롯한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사색(思索)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운 선생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다. 아버지 근암공은 성리학을 심화·발전시킨 이황 선생의 영남학파를 계승한 인물이다. 수운 선생은 수덕문(修德文)에 "···아버님이 세상에 나타나심에, 이름이 한 도( 一道)에 덮였으니 선비들이 모르는 이가 없었고 덕(德)이 육대(六代)를 이었으니 어찌 자손의 남은 경사가 아니겠는가."라 하여, 아버지 근암공의 학문과 선조들의 덕을 높게 우러러보았다.

수운 선생은 16세 즈음 울산의 박씨 부인을 맞이할 결혼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 근암공께서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1840년 2월 20일 7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게 되니, 부친상으로 결혼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근암공은 혈육으로 정씨 부인 소생 딸 1명과 서씨 부인 소생 딸 2명, 그리고 한씨 부인 소생으로 수운 선생과 딸 1명을 남겼다. 아버지를 잃은 수운 선생의 충격은 컸다. 어머니를 잃고 7년 만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감당하기 힘든 큰 슬픔이었다.

근암공은 제우가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오직 학문을 단련시켜 도와 덕을 갖춘 훈장으로서 큰 선비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또한 최씨 문중에서 따돌림을 받을 때나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며 어려울 때마다 아들 편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아버지 근암공마저 세상을 떴으니 수운 최제우는 모든 것을 잃은 천하의 고아가 된 심정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수운, 그 슬픔과 괴로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맹자의 고자장구에서처럼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근육과 뼈를 힘들게 하고, 먹을 것을 굶주리게 하고, 입을 것을 아쉽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 하는 일마다 어렵고 어긋나게 하나니, 이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할 수 없던 능력을 기르게 하고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기 위함이다"라는 말씀처럼 수운의 고난은 예견돼 있었다.

평생 동반자 박씨 부인을 맞이하다

수운 선생은 17세의 나이에, 여동생과 위로 두 분 큰어머니의 소생인 누님들을 제환 형님과 함께 자신이 직접 돌보며 살아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수운 선생은 19세 되던 가을 울산의 월성 박씨(또는 밀양 박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결혼 후 제환 형님 가족과 1년쯤 살다가 집에 불이 나서 큰 곤경에 처한다. 그래서 부인과 양형인 제환의 내외 등 모두 7명의 식구와 같이 지동(芝洞)에 있는 낡은 집을 수리하여, 한 달가량 비좁게 살았다. 그 후 선친이 남긴 용담(龍潭)의 낡은 집인 와룡암)臥龍庵)터 집을 수리하여 이사하고, 제환 형님과 분가하였다.

수운 선생과 제환 형과의 사이는 친형제 이상으로 돈독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형제의 의를 지켰으나 비좁은 집에서 계속 같이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독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심정을 수운 선생은 '수덕문修德文'에서, "아버지의 평생 사업은 불 속에서 자취마저 없어지고 자손의 불초한 여한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되었노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어찌 애석치 아니하랴. 마음으로는 가정지업(농사)을 지키려 했으나 심고 거둘 줄을 몰랐고, 글공부도 독실치 못했으니 벼슬할 뜻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가산은 점점 기울어져 말로가 어찌 될지도 알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결혼 후 아버지가 물려준 집과 재산마저 모두 불타버리고 잠자리마저 걱정해야 하는, 오갈 곳 없는 고아와 같은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수운 선생은 자신에 대한 변화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분 차이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신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사회현실과 부딪치면서 세상에 대한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영남에서도 알아주는 가문의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재가녀라는 어머니의 신분 문제가 바로 자신에게 직결된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꿈일런가 잠일런가 허허세상 허허세상
다같이 세상사람 우리복이 이러할까
한울님도 한울님도 이리될 우리신명
어찌앞날 지낸고생 그다지 시키신고
오늘사 참말이지 여광여취 저양반을
간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고생을
눌로대해 그말이며 그중에 집에들면
장담같이 하는말이 그사람도 그사람도
고생이 무엇인고 이내팔자 좋을진댄
희락은 벗을삼고 고생은 희락이라
잔말말고 따라가세 공로할 내아니라···
'교훈가'

후천개벽도 우공 박홍규 화백은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이 천지가 개벽되는 우주적 차원보다는 사람사는 세상이 개벽되는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는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후천개벽도우공 박홍규 화백은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이 천지가 개벽되는 우주적 차원보다는 사람사는 세상이 개벽되는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는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박홍규

수운 선생은 후일 동학 창도 배경에 아버지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 유불선(儒彿仙) 기성종교의 역할부족, 서학(西學)의 유입과 외세에 대한 경계심 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재가녀 한 씨 부인의 자식이라는 신분문제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자신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진리 즉 해답을 얻기 위한 본격적인 변혁의 고민과 방황이 시작된다.

이러한 상황들이 맞물리며 수운 선생은 구미산 골짜기의 집을 떠나 장사를 방편 삼아 전국을 주유하면서 세상을 구할 도를 찾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인을 설득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수운 선생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듯이 집을 아주 떠나는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는 장삿길의 계획을 말하고, 가끔 집에 돌아와 살림비용도 주겠다며 박씨 부인을 설득하는 데 모든 정성을 들인다. 그리고 장사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환 형님과 주위의 가까운 이들에게 부탁하여 약간의 종잣돈도 마련하였다.

수운 선생의 끈질긴 설득에 박씨 부인은, "내가 당신에게 졌어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살아갈 특별한 대책이나 방법도 없고 해서 당신을 믿기로 했어요"하며 끝내 허락하고 만다.

수운 선생은 부인에게 염치없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이렇게 집을 떠나 장삿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아실 겁니다. 남아로서 무슨 궁색한 변명을 하리오, 이곳 우리가 사는 집이 산속과 같아서 아마 무서운 생각도 들것입니다. 혹시 뜻이 있으면 울산 처가에 가 계셨으면 합니다."

수운은 출세를 결심한다. 집을 떠나 팔도를 유람하는 장삿길을 택한다. 부인과 가족을 집에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괴나리봇짐 하나 둘러매고 천리타향으로 먼 길 향한다. 그 길은 길 없는 길이었고 그 길은 길 있는 길이었다.

덧붙이는 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계속 연재됩니다.
#동학 #천도교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수운최제우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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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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