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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한 말년 병고에 시달리며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29] 이승만정권에 대하여 그는 쉼없는 비판·부정으로 저항하였다

등록 2024.11.13 15:01수정 2024.11.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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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견학 온 아이들로 주변이 밝아 보였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견학 온 아이들로 주변이 밝아 보였다.박금옥

혁명가의 말년은 비참하다.

성공한 혁명가나 실패한 혁명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을, 기존체제와 질서를 뒤짚는 일이 쉽지 않고, 그래서 혁명가가 자주 나오긴 어렵다. 개혁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일과 같은 일이 쉬울 리 없다.

유림은 아나키스트이지만 그 이즘(이데올로기) 속에는 혁명성이 배태되어 있다. 어느 면에서 아나키즘 자체가 혁명이다. 진정한 혁명가에게 타협이나 협상은 금물이다. 아나키스트도 다르지 않다. 해서 정치나 선거와는 그 길이 다르다. 외곬수·고집불통·독선 등 부정적인 언사가 따라 붙는다. 좋은 의미에서는 신념·소신·의지·일관성이다. 단재 신채호·심산 김창숙·단주 유림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외아들 유원식이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일 때 감옥의 책임자가 전향을 하면(독립운동을 포기하면) 아들 간호를 위해 석방시켜주겠노라고 제의했다. 민족사적인 신념을 개인사 때문에 팔아먹을 수 없다고, 거부하며 6년 만기형을 감내하였다.

아들 유원식이 곡절 끝에 괴뢰 만주국 호국군 제3군에 육군 소좌로 종군하고 있었다. 유림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이다.

나는 곧 함흥형무소로 달려가 아버님을 면회하려 했다. 만주국 입대의 허가를 받기 위해 면회 신청을 했으나,

"나는 이제 자식이 없다!"
고 하는 싸늘한 반응으로 면회가 되지 않았다.


보름 동안이나 대기하면서 면회 요청을 했지만, 좀처럼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함흥감옥의 교회사(敎悔師) 고하(古河)를 통하여 몇 차례나 간청하게 되었다.

"아드님 장본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말씀해주십시오."


하는 내용으로 간청을 하여 고하 교회사 면전에서 비로소 아버님 면회가 허락이 되었다.

얼마 만인가, 아버님은 나를 만나자 대뜸 책망하시기부터 한다.

"왜 죽지 못했느냐?"
"……"
"왜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왔느냐?"(주석 1)

아들이 지원한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정권이었다.
앞에서 잠깐 소개한 바 있지만 국회의장 해공 신익희가 함께 일하자는 제의에 '이승만의 기생첩' 운운하며 물리쳤다는 일화, 제2대 총선 당시 독립노농당 출신들이 무소속으로 29명이 당선되었다. 유림은 정치적 배신행위라며 이들을 전원 제명처분하고 외로운 원외장당의 길을 고수하였다.

4월혁명 후 7.29선거에 연고지 안동 을구에 입후보했다가 이번에도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7.29선거 직전 서울 동숭동의 서울문리대 강당에서 많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 이념과 현실의 조화문제에 대해 강연, 뜨거운 박수를 받은 바 있는 유림도 7.29선거에서 패배한 후로 건강이 나빠져 갔다.

그 무렵 만난 적이 있는 송남헌씨(72, 당시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선생은 매일 자신의 팔에 직접 영양주사를 놓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석 2)

그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부인도 귀국하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사실상 별거하다시피 지냈다. 아들 유원식이 만주괴뢰정권의 장교에 이어 일본군 장교가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유림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이유로 부인을 내친 것이다. 부인 이난이는 1946년 눈을 감았다.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살기 위한 유림이가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살고 있는 유림이다. 내가 가정에 얽매인 유림이냐?" (주석 3)

그의 말년을 지켜보았던 최갑용의 증언.

유림은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엄격하였다. 45년 12월 귀국한 이래 그는 온돌방에다 어깨를 대지 않았다. 군인들이 쓰는 야전용 철 침대를 마루방에 두고 거기에서 잤다. 그 옆에 다다미 두장을 펴고 옹기 그릇에 숯을 몇 개 넣고는 손님이 오면 불을 지피고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추위를 참으며 지냈다.

이처럼 유림은 전 생애를 통하여 지나칠 정도의 '결백성'을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기에 그는 일생을 고집과 비타협적인 태도·부정(否定)과 비판으로 일관하였다. 망명생활의 식민지시대에는 일제에 대하여, 해방된 조국에선 이승만정권에 대하여 그는 쉼없는 비판·부정으로 저항하였다. (주석 4)

고결한 영혼을 가진 인간은
명령하지도 않고 복종도 하지 않는다
권력은 비참한 테스트처럼
손댄 모든 것을 더럽힌다
그리고 복종은
재능 미덕 자유 진실 모든 것을 파멸시켜
인간을 노예로, 인간의 육체를 기계인형으로 만들어버린다.

- 퍼시.B.셀리

주석
1> 유원식, 앞의 책, 67쪽.
2> 최갑용, 앞의 책, 134쪽.
3> 앞의 책, 236쪽.
4> 앞의 책, 13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유림평전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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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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