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선생은 일명 '최보따리'라 불렸다. 보따리 메고 관군과 일본군에게 쫓기며 36년간 도주 생활을 하였다. 그 보따리 속에는 수운 대신사의 직필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생활필수품 등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해월 신사의 풍찬노숙의 결과로 조선 팔도는 동학인들로 꽉 들어차게 된다.
박홍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력
잠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력을 살펴보자. 해월 선생의 부친은 종수 어른이며 모친은 월성 배씨로, 1827년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나 포항 신광면 터일 마을에서 자랐다.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이고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이며 훗날 스스로 고친 이름은 시형(時亨)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영일 정 씨를 새어머니로 섬기며 자랐다.
열다섯 되던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세 살 아래인 누이동생과 헤어져 먼 일가의 머슴으로 갔다. 17세 되던 해에 고향인 포항 신광면 인근의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세에 흥해에서 손씨 부인과 결혼하고 10년 고생 끝에 마북동 산골에 땅을 장만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가난하였다. 33세 되던 1859년 마북동을 떠나 더 깊은 산중인 검곡으로 이주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아간다.
35세 되던 신유년(포덕 2년, 1861) 초여름 깊은 산중 검곡에도 새로운 소식, 즉, '경주 용담에 성인이 나서 세상을 건질 도를 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월 선생은 곧장 용담정으로 향하여 수운 선생을 만나뵙고 동학에 입도한다.
해월 선생은 35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수행하며 한 달에 두 번씩 용담을 찾아 수운 선생께 직접 지도를 받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하여 해월 선생은 매일 새벽 냉수로 목욕재계하고 수운 선생의 수심정기 수도법을 조금도 어김없이 실천하였다.
훗날 해월 선생은 '일용행사가 도 아님이 없다' 즉 '모든 일이 다 한울님 일이다'와 '사람의 말이 곧 한울님 말씀이며, 새소리도 천어(天語) '이고, 초목도 한울님 생명'이라는 유명한 법설을 남겼다. 현재 기후 온난화 등 환경 문제를 해결할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관의 탄압이 본격화 된다
1862년 7~8월부터 수운 선생이 머무는 박대여 집에 동학 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수운 선생이 돌아왔다는 입소문도 있었고, 해월의 눈부신 포덕 활동으로 입도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 일대는 민란으로 어수선하였다. 2월부터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민란이 전국으로 퍼졌다.
관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8월경이 되어서야 민란은 진정세를 보였으나, 관에서는 백성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많은 사람이 수운 선생 곁으로 모여들었다. 경주 감영은 민란을 우려하여 수운 선생을 체포한다. 영장(營將)이 수운 선생에게 묻는다.
"너는 일개 가난한 선비로서 무슨 도덕이 있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세상을 조롱하며 이름을 얻어 술가(術家)의 말을 하는가? 너는 의술의 의원도 아니요, 점치는 점쟁이도 아니요, 굿을 하는 무당도 아니다. 생계는 무엇인가?"
수운 선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장을 쏘아보며 대답하기를, "사람을 가르치는 훈학(訓學)을 직업으로 삼는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가?"하며 조금도 굽힘 없이 영장을 꾸짖듯이 말했다. 영장은 수운 선생의 당당한 모습과 의연한 답변에 그만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동학 최초의 집단 시위
9월 29일, 수운 선생이 체포되자 수백 명의 제자가 경주 감영으로 몰려간다. 동학 역사에서 최초의 집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관에서는 민란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수운 선생을 석방한다. 수운 선생은 6일 만에 풀려나 10월 5일 박대여 집으로 가서 짐을 정리하고 곧바로 용담으로 향한다.
수운 선생이 체포되었다 풀려난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도인들이 더욱 증가하였다. 다만 수운 선생은 포덕을 더 신중하게 하도록 하였고 마음 공부에 힘쓰지 않고 이적(異蹟)이나 바라는 도인들을 경계하면서, '말조심 하라'는 뜻의 시 한 수를 지어 제자들에게 건넨다.
병 속에 신선주가 들어있으니 가히 백만 인을 살리리라.
쓸 곳이 있어 천 년 전에 빚어 잘 간직하여 오던 술이다
부질없이 한 번 마개를 열면 냄새도 흩어지고 맛도 엷어지리라
지금 도 닦는 우리는 입조심 하기를 이 술병을 간수하듯 하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