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의 인물사진, 쇼의 얼굴을 넣어 우리나라 정부가 발행한 우표
국가보훈부
1943년 11월 13일 소지영(蘇志英) 지사가 타계했다.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의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3세였다.
그런데 소지영으로는 독립운동사 등 관련 문서에서 검색이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본명이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인이다. 영국인이면서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돕고, 일제에 피체되어 구속까지 겪었으며,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으니 대단한 분이다.
쇼는 39세이던 1919년 5월부터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회사를 운영했다. 당시는 기미만세 시위의 열기가 중국으로 번져와 있던 시기였다. 쇼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열기와 의지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도울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선박으로 폭탄 수송 등 한국독립운동 지원
그는 1919년 7월 무렵부터 1920년 7월 상순까지 안둥현에 있던 본인의 집, 점포, 창고 일부를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대한청년단원에게 빌려주어 독립운동을 도왔다. 또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선박을 제공해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상하이-안둥현 왕복 및 무기, 탄약, 불온문서 등의 운반을 도왔다.
사업 과정에서 습득한 일본 관헌에 관한 정보를 독립운동가들에 알려주기도 하고, 국내에서 조달된 군자금을 자신이 발행하는 수표로 바꾸어 줌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낌새를 눈치챈 일제는 1920년 7월 11일 그를 신의주에서 체포했다. 분명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구실을 붙여서 붙잡은 후 '내란행위 방조' 혐의로 구류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 구속 4개월 만인 11월 19일 석방했다.
독립운동가를 자기 회사 직원으로 채용
1921년 1월 26일 상하이에 도착한 쇼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안둥 교통사무국 재흥 방안을 의논했다. 그 결과 3월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해 안동교통사무국을 재건했다. (임시정부 산하 교통국은 차량 운행을 뜻하는 교통이 아니라 정당의 조직국에 해당한다.)
이륭양행 직원으로 위장한 김문규는 1922년 8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될 때까지 독립운동가 운송, 보호, 소개, 무기운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들 사이의 비밀 통신 및 정보수집, 각종 임시정부 문서와 홍보물 전달, 독립공채 및 군자금 전달 등 안둥교통사무국 기능을 정상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쇼는 1923년 3월 의열단의 황옥·김시현 등이 문서와 무기를 국내에 반입할 때에도 이륭양행의 조직과 선박을 제공했다. 그해 12월에도 장인수·김용원·임득산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륭양행 선박으로 상하이와 안둥 사이를 왕래하고, 폭탄 등 무기를 운반했다.
권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하기도
1924년 초에는 통의부 특파원 박창열·김규일에게 모젤권총을 구입해 주기도 했다. 그 후에도 쇼는 만주 일대 독립운동 단체들과 계속 연락하면서 무기와 탄약을 운송했다. 하지만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점령한 뒤에는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결국 1938년 5월 안동에 있던 이륭양행 본점을 푸젠성 푸저우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중에서 반민족행위자가 허다한 실정에, 한국인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더 열심이었던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의 사례는 우리를 감동시키기도 남는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2023년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우표도 발행했다. 아주 잘한 일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