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서원(愚山書院)상주 외서면 우산리의 우산서원(愚山書院)이다. 우산서원은 이웃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 등 경상도일대에 동학배척통문을 처음으로 돌리며 동학배척운동을 주도했다.
동학혁명기념관
닥쳐올 재앙에 초연한 자세로
수운 선생은 '최후의 생일잔치와 천황씨 반포' 직후, 제자들에게 하루 전날 지은 우음 시 한 구절을 보여주었다.
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 오심극사묘연간 의수태양유조영
(내 마음이 지극히 묘연한 사이를 생각하니, 의심컨대 태양이 흘러 비치는 그림자를 따르네.)
그리고 "이 시의 뜻을 그대들은 혹 풀이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같이 있던 모두가 난해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수운 선생은 제자들을 공부시키다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넓적다리에 닿자 불로 변하여 밤새도록 타며 사람인(人)자를 그렸다. 깨어나서 넓적다리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생겨 사흘을 남아있었다. 이로써 항시 근심되었고 마음속으로 장차 재앙의 화(禍)가 이를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후로 수운 선생은 한울님께 의지하는 마음을 끊고, 장차 닥쳐올 화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로 임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산서원에서 동학배척통문
1863년 7월부터 시작된 동학 배척운동은 9월에 이르러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상주의 우산서원(愚山書院)은 9월 13일, 동학 배척통문(排斥通文)을 이웃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으로 보냈다.
유생들은 동학을 '지금 이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측한 무리가 하는 짓은 분명 서학을 동학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라 단정하여 동학과 서학을 한꺼번에 몰고 갔다.
또 이들은 '옛날에는 감히 경상도 지역에 서학이 들어오지 못했으나, 동학은 선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쭉정이 풀과 같은 것으로 들어와 자라고 있다. 우리들의 시급한 의무는 햇빛을 못 보게 넝쿨을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유생들과 지방관아에서는 동학을 유학의 이단인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통문을 받은 도남서원은 12월 1일(음) 통문을 다시 작성하여 상주지역 옥성서원(玉城書院)등 여러 서원에 보냈다. 통문에는 '주문을 외우는 것은 서학에 따랐고 부적과 물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황건적을 따르는 것'이라 하여 동학을 서학으로, 황건적과 같은 역적으로 몰았으며, 동학도인들을 잡아다가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동학은 귀하고 천함을 구별치 않으며, 백정과 술 파는 자들이 왕래하며 휘장으로 규방을 만들어 남녀가 뒤섞여서 홀어미와 홀아비가 가까이한다. 또한, 유무상자(有無相資)라 하여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여 없이 사는 사람들이 기뻐한다"고 하였다.
기득권의 유생들은 동학을 아주 나쁘고 몹쓸 것으로 매도하였다. "쭉정이 풀과 같은 것, 마귀와 같은 흉측한 무리, 황건적과 같은 역도들, 귀하고 천함을 구별치 않음, 홀어미와 홀아비가 가까이함, 나눔에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며 들어온다." 양반님들, 인즉천(人卽天)을 아시는가? 사람이 곧 하늘임을 알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동학인의 삶과 실천을 어찌 모르는가!
양반과 지식층도 점차 동학에 가담
당시 몰락 양반과 지식층들에게도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들이 동학에 가담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다. 동학도는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고 종이장사, 약종상, 퇴직한 관리들도 많았다. 동학에 들어가면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없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남보다 먼저 알 수 있었다.
유생과 관리들은 동학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자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귀천타파와 남녀평등을 가르치며 인내천주의를 실천하는 동학은, 조선 왕조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로 받아들여 배척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동학에서 만민평등사상이 광범위하게 정착되고 있는 원인의 시초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여자노비 2명의 신분을 해방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수운 선생은 여종 하나는 큰아들 세정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고, 하나는 수양딸로 삼아 조선정부와 양반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동학의 배척과 탄압운동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수운 선생은 1863년 11월(음) 사람을 비롯하여 우주만물에 나타나는 형상에 대한 역설적 논리인 불연기연(不然其然)을 발표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을 위한 여덟 개 문장의 절로 이루어진 전팔절(前八節)과 후팔절(後八節) 즉 앞의 절은 조건절의 형태이고, 뒤의 절은 조건절에 답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그리고 영해, 영덕지방에 풍습(風濕) 돌아 박하선 접주 등이 수운 선생에게 청하여 제서(題書)를 써주어 마음수련과 기(氣)치료의 처방을 내려주었다. 제서의 내용은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지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여 봄같이 화해지기를 기다리라'이다.
들불처럼 타오르는 동학
1863년 11월 25일경에 이르러 동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선전관 정운구의 장계 즉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본다.
당시 문경새재에서 400리가 넘는 경주까지 수십 개 고을에서 동학에 관한 이야기다. 마을과 마을, 절간과 저잣거리 등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늘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경주를 둘러싼 인근 고을에서 더욱 극성스러웠다. 이들은 동학을 이야기할 때 조금도 겸연쩍게 여기지 않았으며, 늘 위천주(爲天主_초학주문), 시천주(侍天主_평생주문)의 글을 읽고 있었다. 주막집 아낙네도 외웠고 산간 초동까지 외우고 있었다.
이들에게 스승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한 사람처럼 대답하는 것과 같이' 경주에 사는 최 선생이라 하였다. 경주에서는 저잣거리와 절간, 나무꾼과 장사치까지 동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어떤 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먼저 꺼내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자진해서 상세히 전해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11월 하순경에 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동학이 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부에서 동학을 본격 탄압하는 적신호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수운 선생은 대책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접주를 친히 임명하였고 해월을 후계자로 키워갔으며, 대중교육을 위한 경전 인쇄를 준비해 갔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며, 순도(殉道_순교)를 당할 것을 대비하여 교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나둘 실천해 가고 있었다.
수운 선생의 예감대로 큰 액운이 닥쳐오고 있었다. 이를 염려하면서 11월 하순경 해월 최경상(시형)에게 그동안 써온 경서(經書)들을 모아 건네며 경전을 출판하라고 명교를 내렸다. 당시 수운 선생께서 경서를 제자들에게 주면 필사하여 나눠 가지곤 했는데, 필사 과정에서 글자가 틀리거나 빠지는 경우가 흔했다. 이러한 사실을 염려하여 '목활자판'으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라고 교시하였다.
해월 선생은 지도자급 제자들과 의논하고 출판 비용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접소를 돌아다니며 경전 간행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던 중 12월 10일(음) 조선 정부가 파견한 선전관에 의해 수운 선생이 체포되면서 경전 간행의 계획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장장 18년이 지난 1880년에 이르러 <동경대전>을, 다음 해인 1881년에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