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선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의 호칭에는 몇 가지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선생, 의사, 열사, 지사, 선열 등이다. 예컨대 선생은,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등이고, 의사는,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 열사는 유관순 열사·이준 열사 등이다. 지사는, 독립운동가 모두를 호칭하며 선열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호칭이 법률적인 급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경일이나 국가기념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의례의 하나인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경우 항일독립운동가 모두를 향한 경배의 의미가 담긴다.
역사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의사와 열사에 대한 용어에 관심을 보여왔다.
1958년 출간된 오재식의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은 의사와 열사는 분명하게 구별하여 기술하고 있다. 몇몇 독립운동가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열사로는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종로서 습격 후 자결한 임상독, 일본 군사시설과 경찰서를 습격하다가 체포돼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후 옥사한 오동진,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후 포위망 속에서 자결한 나석주 등을 거명했다.
의사로는 안중근·이봉창·윤봉길·백정기·편강렬·강우규·송학선·전명운·장인환 등을 언급했다. 여기에 열사로 분류된 사람들은 대체로 의열단 관계자로 거사 현장에서 자결로 죽음을 맞는 경우였다. 참고로 유관순은 '순국처녀'였다. (주석 1)
세계 식민지배 역사상 가장 잔학했다는 평이 따른 일제에 맨 몸으로 혹은 소수인의 조직으로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다.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선열들은 줄기차게 왜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의열사가 그치지 않았고 일제는 마침내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
흔히 미국의 원자폭탁 세례로 일제가 항복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우리 독립지사들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의열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이 국제회의에서 인정된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다루고자 한 독립운동가는 의열사(義烈士)의 편이다. 국가위난기에 의거를 통해 위기를 막고자 몸을 던져 순국한 분들을 의열사라 한다. 성리학적 의리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서든 있는, 그러나 흔하진 않는 일이다.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항일 순국지사 가운데 누구를 의사로, 누구는 열사로 호명하게 된 것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가 주로 무력이나 행동을 통해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을 가리킨다면 '열사'는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죽음으로 정신적 저항의 위대성을 보인 사람을 가리킨다." (주석 2)
최근 뉴라이트들이 득세하면서 독립운동이 폄훼되고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망언이 서슴치 않게 회자되었다. 강도한테 집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집이 강도의 것이 아님에도 정부의 장관이란 사람이 떠드는 망발이다.
심지어 어떤 전직 교수는 일제강점기 "친일파 아닌 사람은 화전민·노예뿐"이라는 망언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마련한 국제 포럼에서 발제하고, 포럼을 주도하는 진행자가 "정말 훌륭한 발제였다"고 동조했다.
한민족 모두가 친일파였으니 굳이 '친일파'를 비판하지 말라는 물타기 수법이다. 어쩌다 광복 80돌을 앞두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타락했는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