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마지막 모습수운 선생은 갑자(1864)년 3월 10일(양 4월 15일) 하오 2시 무렵, 대구 관덕당(아미산 동쪽) 뜰에서 참형으로 순도하였다. 수운 선생이 참형이 집행되기전 목에 큰 칼을 차고 청수를 봉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심고를 하고 계신다. 박홍규 화백이 수운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거룩하고 성인다운 모습으로 그려냈다.
박홍규
수운, 참형에 처하라
3월 2일(음) 조선 왕조는 결국 수운 선생을 참수(斬首_목을 베는 형벌)하고 제자 도인들을 정배와 유배를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유학의 이단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거대한 음모는 동학의 상징인 수운 선생을 처형하기로 한다.
조선 왕조는 결심공판과 최종 판결을 통하여, 백사길, 강원보, 이내겸, 최병철, 이경화, 성일구, 조상빈 형제, 박명중 숙질, 신령인 정생 등은 유배되었고, 그 밖에 이민순, 박춘화는 방면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박생, 박명여는 감옥에서 죽었다. 다행히 박씨 부인과 큰아들 세정은 무죄방면 되었다.
수운 선생은 갑자(1864)년 3월 10일(양 4월 15일) 하오 2시 무렵, 대구 관덕당(아미산 동쪽) 뜰에서 참형으로 순도하였다. 이단의 동학으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과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 사술이며 서학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참형시켰다.
*천도교에서 발행했던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의 끝을 장식하는 내용을 살펴본다. 거룩한 이의 죽음은 1923년 3월에 수운 선생의 순도과정을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듯 개벽지에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다.
「(수운) 선생의 마직막 청을 들어 나졸이 냉수(청수) 한 그릇을 새로 떠왔다.
선생은 등상(凳床)에서 일어나 흙 위에 백지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냉수 그릇을 놓고, 가만히 흙 위에 꿇어앉더니, 눈을 감고 손을 읍하고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있다.
돌아선 사람들 중에도 선생 모양으로 꿇어앉은 이가 여기저기에 보이며, 어디선지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무극대도대덕,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는 소리가 울려온다.
선생은 일어나 한 번 더 사람들을 휘 둘러보고 등상에 앉는다. 칼 든자 칼을 둘러메고 뚜벅뚝벅 세 걸음 걸어나와 왼편에 서더니, "웨에이" 하는 소리에 칼을 번쩍 머리 위에 높이 든다.
햇빛이 칼날에 비치어 흰 무지개가 선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통곡성이 사면에서 일어난다.」
수운 선생의 시신은 관덕당에 방치되었고 머리 부분만 남문 밖 길가에 3일간이나 내다 걸어두었다. 수운 선생의 참형을 집행한 사흘 후 순찰사는 수운 선생의 처자 즉 박씨 부인과 큰아들 세정을 불러 시신을 거두도록 한다. 이때 염습을 한 사람은 김경숙, 김경필, 정용서, 곽덕원, 임익서, 김덕원 등이다. 수운 선생이 참형을 당한 대구 장대는 지금의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일대로,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있는 번화한 곳이다.
조선 정부는 수운 선생을 참형하였으나 후계자 최경상(최시형)을 체포하지 못한 것이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감시망을 확대하고 추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해월 선생은 1월 20일 관이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젊은 도인 김춘발과 같이 대구성을 빠져나와 안동 쪽으로 숨어들어 동학의 재건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