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 별빛따라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야밤을 틈 타 동지들을 규합하고 조직해 나갔다. 캄캄한 밤중에 오직 별빛을 바라보며 홀로 큰 야망을 계획하기 위해 숨소리, 발소리도 죽여가며 새 세상을 염원하는 무명동학군의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판화로 그려냈다.
박홍규
2편 :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다
<일러두기>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의병전쟁
동학농민혁명은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반봉건 민주화운동의 1차 기포와 반외세 항일무장투쟁의 2차 기포로 구분한다. 물론 1차 기포에도 반외세가 있었으나, 반봉건이 더욱 강했으므로 동학농민혁명이라 칭해야 맞다. 그리고 2차 기포는 반봉건이 아니라 순전 반외세의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동학의병전쟁이었다.
1892~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기포에서 첫 출발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무장기포와 백산대회에서 동학연합군 성격의 동학농민혁명군으로 본격 출발한다. 이후 황토현 승전과 장성 황룡전투 승리에 이르고 마침내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성 점령이라는 일대 쾌거를 이룬다.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최대 변수인 외세 개입과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은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최초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집강소 설치에 의한 폐정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복궁 침탈과 친일정권 수립 등 일본군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호남의 동학 의병들은 척왜창의의 기치를 들고 남원대회와 원평 논의를 거쳐, 태인을 출발 삼례에 이른다. 삼례에서 제2차 기포를 결행하였고, 논산에서 동학의병연합군을 결성한다.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전국 기포령을 받은 동학창의군 대통령 손병희는 의병대장 전봉준과 함께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공주성을 앞두고 후퇴와 응전을 거듭하다가 한 많은 고개 우금티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한편 영동·영산, 서산·태안, 여산, 청주, 진천, 율곡, 산현, 하동, 진주, 남해, 사천, 하동고승당산, 충주, 홍천, 평산, 석현, 구월산, 장수산 전투 등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등의 우리나라 고을은 물론 강산의 계곡마다 봉우리마다 동학의병창의군은 최후까지 싸웠으나,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 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결국 전봉준 등 호남의 동학의병(東學義兵)의 주요 지도자가 체포되고, 최시형 선생과 손병희 통령의 보은 북실, 이방언 장군의 장흥 석대벌, 김석순 접주의 완주 대둔산 전투 등을 끝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30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3만여 명(최대 5만여 명)의 희생을 내고 좌절한다.(일부 학자들은 참여인원을 100만여 명, 희생 즉 순국의 인원을 30만여 명으로까지 본다).
녹두 전봉준, 그는 누구인가
(녹두 전봉준, 한 시대를 이끌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에 대해 짤막한 설명은, 봉준이 살다 간 일생이 태양과 같다면 마치 반딧불과 같은 내용으로 간소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전후에 있어서는 뒤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만 여기서는 혁명 이전에 전녹두에 대해 가벼운 소개로 갈음한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처음 이름은 철로(鐵爐)이다. 봉준의 호(號)는 해몽(海夢)이며, 본관(本貫)은 천안(天安)이다. 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의 후손이며, 성인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이름은 명숙(明淑)이다.
전봉준은 1855년 전북 고창읍 죽림리 당촌(高敞邑 竹林里 堂村)에서 아버지 전창혁(全彰赫)과 어머니 언양 김씨(彦陽 金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봉준의 어린 시절 별명은 철로(鐵爐_쇠, 화로)라는 이름에서 따온 '쐬화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당촌마을 인근에서는 '골목대장 쐬화로'라는 꽤나 유명한 별명이 따라다녔다. 또 전봉준은 13세(1868년)에 백구시(白駒詩)를 지어 시문에도 능통한 기질을 발휘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은 청소년 시절부터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다. 봉준의 특출한 외모에서 발상한 '녹두'라는 별칭으로 '전녹두(全綠豆)'라 불렸다. 봉준은 키와 체구가 작았으며, 얼굴이 둥글고 이마가 튀어나온 짱구로 영락없는 녹두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차돌처럼 야무지고 리더에 있어서 남다른 똑똑한 소년이었다.
녹두 전봉준의 눈빛은 좀체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곧고 빛이 났으며, 얼굴색은 깨끗하고 맑았다. 특히 눈썹이 누에나방 모양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표정을 보면, 매우 엄격하고 올곧으면서도 따뜻한 성정인 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준은 영웅호걸의 기상을 갖춘 작은 거인이었다. 또한 봉준은 한 시대를 이끌어가고,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만한 위인(偉人)으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전봉준은 1890년 36세에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였으며, 1892년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고부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서울로 올라가 흥선 대원군을 방문하여 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하여 대원군을 놀라게 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전봉준은 갑오년(1894) 동학기포 전후(前後)에 태인(泰仁) 산외면(山外面) 동곡(東谷)에 거주지를 정하였으며, 또한 고부군(古阜郡) 조소리(鳥巢里)에서도 살았다.
봉준은 먹고 사는 일에는 약간의 농사일과 주로 선비로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訓長)일을 하였다.
전봉준의 가족은 모두 6명이었다. 사별한 첫째 부인 여산 송씨가 낳은 딸 '옥례·성녀'와 재혼한 부인 남평 이씨(이순영)가 낳은 아들 '용규·용현'이다. 녹두는 어쩜 떠돌이 인생을 산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가정적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 전후에 있었던 내용들은 앞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과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해대며 살았다. 친구들과 막대기를 하나 들고 호령하기 시작하면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이 되었다. 동학 격전지 김제 원평 부근 마을에서 태어난 탓도 있지만 세종대왕과 같은 문인보다는 우리가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을 더욱 흠모하면서 자란 전후(戰後) 세대이기 때문이다. 동학군의 무기 죽창,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대나무만 보면 나는 대숲을 서성였을 그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