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체코 플젠 산업단지 내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에서 원전 전주기 협력 협약식과 터빈 블레이드 서명식을 마친 뒤에서 페트로 피알라 체코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체코 원전 수출 꿈 아닌 어음으로 드러나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체코 방문 직전 다 성사된 것처럼 떠벌였던 체코 원전 수출이 현찰이 아니라 어음이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윤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의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엇갈린 말이 이런 실상을 잘 보여줬습니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지식 재산권 분쟁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먼저 윤 대통령이 "양국(한-미) 정부는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고, 우리 정부도 한·미 기업 간 원만한 문제 해결을 지원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때처럼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파벨 대통령이 이어 "최종 계약이 체결되기 전 확실한 건 없다. 분쟁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이로운 것이고, 오래 끌지 않고 합의를 보는 것이 양쪽에 유리하다. 이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나쁜 시나리오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체코 대통령의 말에서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면 한국과 미국 사이의 분쟁 해결이 선결 과제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일본제철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윤 대통령의 발언이 얼마나 순진하고 현실성이 없는지 드러납니다. 우선, 한-미 두 나라가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는 것과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지식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워싱턴 선언'에서, 원자력 분야의 '지식 재산권 존중'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덥석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윤 정권이 아무리 동맹을 강조하고 미국을 짝사랑해도, 미국은 그런 것에 눈도 끔쩍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냉엄한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한 언행입니다. 지식 재산권 분쟁도 없고 도리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미-일 양국 경제계의 의견이 쇄도하는데도 일본제철이 집중적인 견제와 냉대를 받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US스틸과 웨스팅하우스 모두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주 소재 기업
두 정상의 발언으로 볼 때, 윤 대통령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셨습니다. 원전 수출을 매듭지으려면 체코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미국(웨스팅하우스)과 지식 재산권 분쟁부터 확실하게 타결해야 했습니다. 장관급에서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미국으로 달려가 풀겠다는 결기라도 보여야 했습니다. 미국과 분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 된 밥'인 것처럼 체코로 달려간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헛된 방문이었습니다. 원전 수출이라는 허황된 꿈에 취해, 지지율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바늘허리에 실을 매고 달려든 꼴이 됐습니다.
일본제철 사례와 비교하는 김에 한수원에 지재권 소송을 제기한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어느 곳에 있는 기업인지 찾아봤습니다. 우연하게도 일본제철이 인수하려는 US스틸과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원은 9천 명이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때 가전제품도 생산하고 방위산업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현재는 원자력 전문기업으로 변신했습니다. 쇠락한 제조업인 제철 회사와 사정은 좀 다르겠지만 같은 펜실베이니아 소재 기업이라는 점에서 다른 곳보다 보호주의 정치 바람을 강하게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말 네덜란드 방문 때 '반도체 동맹'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회사 에이에스엠엘(ASML)은 최첨단 노광장비를 삼성전자가 아닌 미국의 인텔에 맨 먼저 납품했습니다. 한국과 체코의 '원전 동맹'도, 말만 요란할 뿐 전혀 실속이 없었던 네덜란드와의 반도체 동맹 짝이 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윤 대통령의 체코 방문을 보면서 역시 '잘하는 외교'는 화려한 백 번의 말이 아니라 한 번의 확실한 실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8
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