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 밭에 심은 갓을 뜯는 어머니, 갓 김치 맛이 궁금하시죠?강기희
부침이 많은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는 지난 1999년에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살던 집을 몇 번이고 팔아야 했던 일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그 즈음부터 아버지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내게 아버지는 화끈하고 남자다워 좋았다. 고교시절 배낭을 꾸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알아서 여비를 챙겨주시던 아버지였다. 그럴 때마다 겁이 많은 어머니는 무서운 세상이라며 여행길을 막아섰다.
"무섭긴, 사내자식은 길에서 인생을 배워야 하는 거여."
아버지는 그런 말로 아들을 여행지로 떠나보냈다. 1998년 초, 아버지는 고향인 정선으로 돌아가고 싶다 했다. 이미 칠순도 훌쩍 넘겨 초로의 늙은이가 된 후였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평에 집을 구했다며 한 번 보고 오라 했다. 아버지가 구해놓은 집은 너무 낡아 수리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큰 형 내외가 아버지가 근처로 오는 걸 극구 반대했다. 노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청에 알려지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며 반대를 한 것이다. 당시 큰 형은 면사무소에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했는데, 그래도 공무원의 신분이었다.
아버지의 고향행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돌아오는 길 정선 버스터미널에서 생활 정보지 한 부를 챙겨왔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생활 정보지에서 빈 집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위치는 영월군 주천면이었다. 영월이면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데다 서울에서도 부담스런 거리는 아니었다.
다음 날 주천행 버스를 탔다. 주인에게 물어 빈 집을 찾아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호두나무 한 그루가 마당가에 있었고 허물어지긴 했지만 담장도 쓸 만 했다. 주인에게 당장 집을 쓰겠노라 전화를 했다. 주인은 그래도 계약이니 전세금 형식으로 50만원이라도 걸으라고 했다.
그쯤이야, 하고 선뜻 냈다.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 집수리를 시작했다. 혼자 먹고 자면서 뜯고 치우고 쌓고 세우고 바르고 묻고 칠하고를 한 달 가까이 했다. 수원에 사는 작은 형은 집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날라다 주었다.
집수리를 끝내고 부모님을 모셨다. 그날은 동네 잔치를 곁들인 술자리까지 마련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행복해 했다. 마당엔 텃밭도 가꾸었다. 여름이면 가꾼 채소로 쌈도 쌌다.
아버지의 행복은 채 2년도 가지 않았다. 1999년 초 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그해 10월 중순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76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문제였다. 무서움을 많이 타는 어머니는 혼자서는 죽어도 못 살겠다고 했다. 결국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마침 아이들이 어린 탓에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였다. 어머니는 천마산 아래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7년을 살았다.
길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