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정권 임기중 북한변화 가능성
현실적 대북정책 펴는 대통령 선호"

[보수대해부 제2부-논쟁③] '주사파 대부'의 북한민주화운동

등록 2007.01.24 08:57수정 2007.02.15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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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독재타도'를 외쳤던 이른바 386 운동권이 '좌파타도'를 외치는 현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변절'이라고 부르고 일부에서는 '전향'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전향은 대개 '좌파'에서 '우파'로 방향을 바꾼 것을 의미한다. 그 역은 대개 성립하지 않는다. 좌파가 터부시되어온 남한 사회의 당연한 '문법'이다. 물론 우파가 금기시되어온 북한 사회의 문법은 당연히 그 반대이다.우리가 한때 '남파'(남파공작원)와 '빨치'(빨치산) 출신의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들을 굳이 '미전향 장기수'라고 부른 것도 '아직' 전향을 안했지만 '언젠가' 전향을 시키고야 말 것이라는 국가주의의 발로였다.'남한 공산화'에서 '북한 민주화'로 180도 바뀐 혁명가의 꿈한때 '남한내 10만 주사파의 대부'로 통했던 강철 김영환(45)은 자생적 공산주의였다가 공안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전향'한 혁명가이다.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혁명을 꿈꾸지만 그 대상은 '남한 공산화'에서 '북한 민주화'로 180도 바뀌었다. 김영환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향'이라 했을 때는 소중한 가치를 모두 내팽겨쳤다는 식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전향'이란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면서도 "어쨌든 커다란 변화의 계기는 북한 체제와 사회주의권의 붕괴 때문이었다"고 밝혔다.그는 "처음에는 스스로 왼쪽에 있다고 규정하고 '좌우 대단결'을 내걸었지만, 왼쪽이나 진보에 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는 없었다"면서 "실질적인 (북한 민주화) 활동에는 결국 우파, 보수파들만이 참여했다"고 밝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 북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그는 이어 "이념만으로 놓고 보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족·국가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파는 아니다"면서 "그런데 현실 정치지형으로 볼 때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고 말해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뉴라이트'로 규정됨을 인정했다.이른바 6·29 선언으로 직선제 쟁취했지만 독재와 타협한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은 87년 6월 항쟁 당시 남한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혐의로 구속중이었던 김씨는 87년 체제에 대해 "영국의 명예혁명에 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자산이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제도 정치권 386 운동권 출신, 정책적 훈련 부족으로 미숙그러나 그는 6월항쟁에 참여했던 제도 정치권 386 운동권 출신에 대해서는 "이들이 대부분 운동권 중심부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고 하나의 세력으로 제도권에 진출한 게 아니어서 체계적인 정책적 훈련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그는 또 "이들이 대학 때와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지만 바뀐 사상이 뭔지 불투명한 데다 그 사상에 기초한 정치적, 정책적 훈련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보니 정치적, 정책적으로도 미숙한 면이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그러나 그는 "우파에서는 그 사람들을 좌파다, 빨갱이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대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면서 "정치세력으로서, 혹은 개별 행정인으로서 거의 훈련이 돼 있질 않았다는 게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한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대표 한기홍) 연구위원과 <데일리NK> 논설위원 그리고 뉴라이트재단의 기관지 <시대정신> 편집위원을 겸하고 있는 김씨는 북한 민주화운동에 대해 "체제변환을 추구하지만, 변환 과정에서 적은 사람이 희생되고, 사회 충격이 적은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방향을 지지한다"면서 "만약 김정일 정권이 붕괴한다면 다른 체제가 지속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고 전망했다.또 그는 "김정일 후계 당시엔 시대적, 국제적으로 공산주의 운동 자체가 안정됐던 상황이었고 김일성의 권위나 권력이 확고부동했지만 현재 북한은 불안한 조건이다"면서 "어떤 계기만 있으면 터질 정도로 밑에서부터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망했다."차기 대통령 임기중 북한 변화 가능성…현실적 대북정책 펴는 대통령 선호"@IMG3@김씨는 대선을 앞두고 뉴라이트와 정치권과의 관계설정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선을 그었다. 그는 "뉴라이트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긴 하지만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새 정당을 만든다는지 하는 방식으로 분리해 나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뉴라이트 운동 자체는 연구 및 시민운동 차원에서 지속돼 나가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그는 특히 "차기 대통령 임기 중에 북한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더 현실적인 정책를 펴는 대통령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개인적인 후보 선호 기준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생각은 없다"면서 "그것은 단체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그러면서 그는 2002년 대선 당시에는 ▲세계화의 적극적인 추진 ▲기업 자유화 ▲교육 자율화 ▲미·중·일 3국에 대한 적극적인 우호 정책 ▲북한과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 등 다섯 가지 기준을 놓고 이에 부합하는 후보를 지지했다면서 "이번 대선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80년대 ‘강철’이란 필명으로 주사파 학생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활동하다가 91년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나 면담한 김영환씨는 이번에도 예전처럼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필자는 99년에 그를 장시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일종의 그의 '전향의 변'인 셈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전향의 꼬리표를 차고 있는 그를 다시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탐색하는 인터뷰를 가졌다.[과거 : 주사파의 대부 및 김일성 주석 면담]- 김 위원이 1986년 서울대에서 구학련(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해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한때 남한에 주사파가 10만명이라는 얘기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가."주체 사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주체 사상의 철학적 내용과 김일성 주석이 그것이다. 그런데 흔히 '주사'라고 얘기하지만 주체사상의 철학적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문구적인 이해는 어렵지 않지만 철학적 의의나 본질 등을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반 사람들한테 먼저 다가오는 건 북한 및 김일성과의 연계 속에서 이해되는 측면이 크다. 과거 80년대 학내 운동권 내에서도 주체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주사파가 많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북한 체제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권위가 떨어진 것과 연계되어 (북한체제와 김일성을 추종해온) 주사파도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독재타도'를 외쳤던 운동권이 '좌파타도'를 외치는 현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변절'이라고 부르고 일부에서는 '전향'이라고 부른다. 전향의 직접적 계기는 무엇이었는가."북한 체제와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우리 기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북한은 민중 탄압적이고 비인권적이고, 주민들을 빈곤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체제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길로 갔다. 그런데 북한 체제와 친북 세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큰 사건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스로 왼쪽에 있다고 규정하고 '좌우 대단결'을 내걸었지만, 왼쪽이나 진보에 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는 없었다. 실질적인 (북한 민주화) 활동에는 결국 우파, 보수파들만이 참여했다. 이념만으로 놓고 보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보수다, 이렇게 볼 수 없다. 우리는 민족·국가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파는 아니다. 그런데 현실 정치지형으로 볼 때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전향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나."우리는 스스로 '전향'이란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고 '전향'이라 했을 때는 소중한 가치를 모두 내팽겨쳤다는 식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커다란 변화의 계기는 북한 체제와 사회주의권의 붕괴 때문이었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의 붕괴가 일차적인 충격이자 제 일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91년 방북 시점에 이미 동유럽은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그때 이미 신념이 흔들린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밀입북한 것은 아닌지. 밀입북 목적은 무엇이었나."동구권의 붕괴 도미노를 보면서, 특히 89년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과 차우세스쿠의 종말을 보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계획경제, 국유화로는 전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 패러다임의 기초가 뭐냐 했을 때, 그 기초를 주체사상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북한 체제를 이상으로 삼은 건 아니었다.(동구권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주체사상에서 뭔가 새로운 빛을 봤기 때문에, 주체사상에 기초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한 체제를 갑자기 바꾸진 못하겠지만, (김일성 주석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복안,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북한에 갔다. 개인적으로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이 주체사상과 관련해 새로운 미래상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기대와 달랐다."@IMG2@- 다른 인터뷰에서는 "김정일 정권 타도에 이 한 목숨 바쳐야겠다"라고 결심한 것은 개천교화소를 경험하고 탈북한 이순옥씨의 증언과 이한영씨의 증언 등이 잇달아 나오던 96년경이었다고 밝혔는데 이순옥씨 등 일부 탈북자 증언은 상당히 과장된 것 아닌가."어느 정도 과장된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당시 출판매체에 나온 이순옥씨 증언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나중에 이씨 사례를 검증할 때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정황을 파악했다. 이씨의 증언 내용을 교차적으로 검토해보면 사실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는 북한 사회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이씨 증언이 내 결심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지금 그렇게 크게 다가오는 건 아니다. 현재는 정확한 정보를 통해 북한 사정을 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94년 7월)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 위원이 '김일성주의자'였다는 것이 당시 동료들의 평가인데, 그렇다면 혹시 시쳇말로 그때까지 '양다리를 걸친 것'은 아니었나."양다리를 걸치는 게 제 개인적으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입장에선 주사파 운동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빨리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생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책임감이 컸기 때문에 혼자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을 끌고 갈지를 생각했다.난 주체사상(인간중심 철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연구하고 토론하고 있는 중이다. 당시 '푸른 사람들' 준비위 시절의 내부 기관지 <빛>에 내가 쓴 글을 보면, 주체사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확고한 견지를 갖되 친북, 김일성·김정일 부자, 계획경제, 국유화 등 나머지는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사파 운동권 내에) 이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나는 당시 같이 운동을 한 사람들과 함께 친북노선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길로 가고자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도 92∼93년께다. 나로서는 '절묘한 줄타기'를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다 보면 '친북'에서 벗어나는 게 되고, 명분을 잃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하영옥씨 등 다른 동지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94년 7월 4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사망 소식을 듣고 어떤 느낌이었나."글쎄요. 당시 '푸른 사람들' 준비위원들과 관악산 등산을 하고 있다가 꼭대기에서 라디오로 소식을 처음 들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91년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을 때 주로 무슨 얘기를 했나. "김일성 주석은 과거 본인의 반일 활동상을 많이 얘기했다. 그밖에 김주석이 최근 일주일간 만난 손님들 이야기를 했는데, 손원일 제독의 동생 손원태 박사를 만났던 일, 옛날에 손 박사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와 지낸 이야기 등을 했다. 또 송두율 교수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묻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김일성 주석은 만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때 손정도 목사의 아들들과 의형제처럼 지냈다. 한국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과 재미 원로의사였던 손원태 병리학 박사 등 손 목사의 자녀들과 김 주석이 친형제처럼 지낸 특별한 인연은 김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손정도 목사' 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회고록에서 김 주석은 지린성에서 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감옥을 나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달 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면서 "아버지처럼 따랐던" 손씨 일가와 친교를 회상했다. 손 박사는 1991년 북한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 이유신씨와 함께 처음으로 방북해 김 주석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 주석의 생전 약속에 따라 1994년 8월 11일 상중(喪中)에도 불구하고 손 박사를 평양으로 불러 고위 당·정 간부들을 대거 참석시킨 가운데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줬으며, 손 박사를 위해 별장(철봉초대소)을 지어주기도 했다. - 편집자]@IMG5@- 국정원에 따르면 송두율 교수는 서열이 높았는데 김 위원에게 믿을 만한지 묻기도 했나."서열이 높다고 해서 북한이 신뢰하진 않는다. 물론 김 주석은 나도 믿지 않았다. 서열이 높다는 건 그렇게 예우를 해준 것일 뿐이다."- 김 위원의 활동에 대한 격려도 했나."많이 격려했다. 내가 쓴 글(유인물- 편집자)은 활자를 다섯 배로 확대해서라도 다 읽었다면서 '대단하다'고 칭찬도 하고 그랬다. (남한내) 조직사업에 대한 얘기도 했다."- '10만 양병설'에서 보듯, 10만 명은 우리 역사에서 상징적 수자이다. 결과적으로 김 위원은 남한의 NL운동권에 주체사상의 환상을 전파한 책임도 있지만, 90년대 초반에 김일성 주석과 대남공작 지도부에 붕괴하는 동유럽과 달리 '주사파 10만 명'으로 남한을 통일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책임도 크다. 이를 인정하는가."그런 측면도 있다. 김 주석이 당시 이란 대통령 만나서 이란 혁명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어떤 조그만 마을에도 우리 세포가 다 있었고 이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김일성이 내게 구체적인 숫자까지 거론하며, (남조선에)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 100만 명만 있으면 남조선 혁명은 성공한다는 얘기까지 한 걸 보면, (김 주석에게) 환상을 심어준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정일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이어서 김정일이 그런 환상을 가졌을지는 약간 의문이 든다."[그는 99년 인터뷰 때는 김일성 주석이 "무엇보다도 사상이 중요하다. 남조선 인민들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남조선 인민들 1000만 명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100만 명은 1000만 명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전향에는 반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10만명의 주사파를 잘못 이끈 데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진 적이 있는가.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지만 당신의 공개전향은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에서 큰 관심을 가질만한 사건이고 또 그렇게 했다면 소모적인 논쟁과 한총련 시위도 오래가지 않았을 터인데."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볼 때도 불만이다. 그런데 저는 당시 중국에 있어 뭔가 일을 주도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일 처리가 만족스럽게 된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수세적이고, 일면으로 쉽게 반감만 가져오고, (운동권에는) 영향을 적게 미치는 방식으로 일처리가 됐다."- 99년 <월간조선>과의 서면 인터뷰가 첫 전향 선언이었는데 기자회견 같은 공개적인 전향의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특별한 사정이 있었나."전향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또 전향을 밝히기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나의 (사상적) 전향이 공안적인 관점에서 제기가 된 것도 아니었다. 또 공개 전향한 뒤 공안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것도 같고 해서…. 그리고 이미 <말>지에 쓴 글이 실질적인 공개 전향 선언이었다. 그때 이미 북한의 수령체제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때 저는 중국에 있었는데 그 글이 운동권 내에서는 격렬한 반론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외부인에게는 김 위원이 전향을 공개선언하지 않고 수사기관에 체포되어 반성문 쓰고 전향한 것으로 비친다. 전체 운동권을 전향시키기로 결심했다고 했지만 비겁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다.(당시 '총책' 김영환은 97년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한 것이 참작되어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했던 하영옥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이 인정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석방되었음). "당시 내가 잡힌 경위 등이 공안기관에서 봤을 때도 기분 좋은 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고, 수사과정 자체만 두고 보면 공안기관에서는 봐주고 싶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수사가 진행될수록 제가 공안기관에 잡히기 전에 이미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전향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왔기 때문에 (공소보류 처분으로) 봐준 것이라고 본다.그때 많은 분들이 기소당해 처벌을 당했다. 또 우리와 정치적으로 갈라섰다. 그런데 내가 지휘관으로 있을 때의 일을 대상으로 처벌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지금은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처벌받은 내용은 내가 지시한 활동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도, 지금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나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97년부터 2년 정도 독일, 중국 등에 체류하다가 민혁당 사건이 터진 99년에 귀국한 것으로 아는데 두 나라에 체류한 목적은 무엇이었나."99년 7월 말 귀국했는데 97년 독일로 갔을 때는 사건(간첩 사건 - 편집자)의 본질이 뭔가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한국 정부가 심하게 나를 추적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서 인권의식이 거의 없는 중국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히 정치범에 대한 인권의식이 높은 독일로 가자는 생각에서 무작정 떠난 것이었다. 독일에서 범청학련 학생들과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두 달 정도 보냈다. 그러다가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해 다시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97년 대선에서는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이었나."('푸른 사람들'에서는) 95년에 합법 정치노선으로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DJ(김대중)는 정계 은퇴를 번복하는 등 거짓말을 해 지지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는 진보 중심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자며 권영길 후보를 밀자는 분위기였다. 권 후보는 민혁당과도 직·간접적으로 많이 연결됐다. 과거 민혁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권 후보를 지지했다."@BO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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