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협' 의원 10인, 의정 성적표 매겨보니

종합성적 이기우-오영식-우상호... '이라크 파병'엔 기대와 다른 반응

등록 2007.06.11 16:54수정 2007.06.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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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의정 성적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

▲ 17대 국회 전대협 출신 국회의원(윗줄 왼쪽부터 김태년,우상호,이인영,백원우,오영식 아랫줄 왼쪽부터 정청래,최재성,이기우,임종석,한병도 의원)
ⓒ<여의도통신> 사진팀

6월항쟁 20주년이다. 6월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의 비교사적 의미 부여는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4·19는 항쟁이 끝날 때까지 지도부가 없었다. 5·18은 항쟁의 와중에 지도부가 구성됐다. 6·10은 항쟁 이전에 지도부를 만들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역사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6월항쟁이 끝날 때까지 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할 수 없었던 세력이 있었다. 학생운동 그룹이 바로 그들이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에게는 과격·용공·폭력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대반전을 준비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한국 현대사의 격랑의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6월항쟁이 끝난 뒤 그해 8월 19일 그들이 만든 조직이 바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였다. 단절과 분열이라는 관행의 고리를 끊어낸 전대협의 역사는 이후 6년 동안 이어졌고, 그것은 한국 학생운동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전대협 출신 12명이 당선, 국회에 입성했다(임종석·오영식 의원은 재선. 이철우·복기왕 전 의원은 의원직 상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대다수 언론은 전대협 출신 의원을 조명하되, 몇 명의 추억과 회고를 재구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은 방향을 달리 하기로 했다. '걸어 다니는 독립적 입법기관'인 전체 10명 의원의 의정 성적표를 작성해 보기로 한 것이다. 법안의 발의건수·처리율·제정안·출석률 등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와 더불어 종합성적도 매겨보았다.

입법활동에 대한 분석만으로 정치가에 대한 총체적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과잉'과 '정책 빈곤'의 풍토에서 누군가는 이러한 시도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17대 국회 개원 당시부터 <여의도통신>이 그 역할을 담당해 왔거니와, 앞으로 보다 발전된 평가 방식을 개발할 것이다. 아울러 18대 총선 직전까지 17대 의원 299명 전원에 대한 의정 성적표도 작성해 유권자 앞에 내놓을 것을 다짐한다. / 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발의건수' 최재성-'제정안' 이인영-'처리율' 오영식

87년 당시 명동성당에서 구호를 외치던 학생,시민들.
87년 당시 명동성당에서 구호를 외치던 학생,시민들.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장
"6월 10일 연세대학교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향했다. 오후 6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거리로 뛰어들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나는 구호를 외치며 주변에 있던 학생들과 함께 도로로 뛰어들었다. 백화점 안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척하며 기다리던 학생들이 달려 나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명동 지하도 입구에 배치되어 있던 전경들이 멀리서 달려오는 것도 보였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한열이를 살려내라!'

…(중략)…오후 7시 20분. 도로에 뛰어든 대열이 많아졌다. 2만여 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오오, 이럴 수가! 민주주의 만세! 사방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 주변을 가득 메운 그 인파는 평소 꿈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었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1기 부의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은 자서전 <촌놈>에서 87년 6월 10일을 이같이 회고하고 있다.

바로 전날 연세대 시위 중 연세대 학생 이한열(경영학과 86학번)이 경찰의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다. 당시 학생들은 연대에서 '전두환 노태우 화형식'을 끝내고 교문 앞으로 진출하려던 상황이었다.

이한열의 피격 소식에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했다. 직선제 쟁취와 독재타도의 외침은 6월 10일 전국 514곳에서 울려 퍼졌다. 50여만 명이 참가했고 이 중 3831명이 연행됐다. 6·10 항쟁의 시작이었다.

경찰은 시위 주동 혐의로 13일 국민운동본부 간부 13명을 전격 구속했으나 항쟁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국민운동본부가 '최루탄 추방의 날'이라 선포한 18일에는 전국에서 150여만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1487명이 연행됐다.

그들에게 6월항쟁은 지금 어떤 의미인가

6월항쟁은 26일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전국 33개 시, 4개 군·읍에서 18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이른바 '넥타이 부대'는 전두환 정권을 놀라게 했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3467명이 연행됐고, 경찰서 2개소와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되거나 방화됐다.

마침내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감독 전두환, 주연 노태우'의 쇼에 불과하긴 했지만 김대중 사면·복권, 언론자유 창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6·10 시위 이후 만 17일간 전국에서 열린 시위는 총 2145회, 발사된 최루탄은 35만발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 동안 학생운동을 주도했거나 2·3학년 대학생 신분으로 거리를 내달렸던 전대협 출신 의원 10인인 김태년·우상호·이인영(이상 전대협 1기)·백원우·오영식·정청래·최재성(2기)·이기우·임종석·한병도 의원(3기)에게 6월은 특별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이인영(고려대 총학생회장·전대협 초대의장) 의원은 6월 10일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았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놀랍게도 멀리서 들리는 함성에 벅찬 가슴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날의 현장을 나는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고 있었다. 6월 1일 잡혀 들어가서 17일 풀려나올 때 나는 이미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구속된 상태에서 구속 취소로 풀려나는 초유의 일이 내게 벌어졌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1987년 6월 10일 우리는 정의로운 나라를 보았다. 정의로운 시민과 학생들을 보았다. 나는 그 위대하고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갔을 뿐이다.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내 작은 노력에 비해 그때 이미 나는 과분한 격려와 보상을 받았다." (이인영 의원 홈페이지)


임종석(한양대 총학생회장·전대협 3기 의장) 의원에게는 "개인의 틀을 넘어 사회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6월 10일, 그날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고 밤 10시가 넘도록 남대문시장으로 퇴계로로 또 서울역으로 뛰어다녔다. 방황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 이제 내 생활은 하루하루가 치열했고 하루하루가 신명났다." (임종석 의원 홈페이지)

"학보사 기자생활을 하며 민족 조국과 민주주의를 알게 됐다"는 정청래(전대협 2기 조국통일특별위원장) 의원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지하학생운동조직에 가입하고 6월항쟁의 거리에서 어깨동무하고 뛰었다. 그러다가 6월 26일 첫 피검되어 집시법 위반으로 서초경찰서에서 첫 구류를 살며 노태우의 6·29 선언을 보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생애에 첫 번째로 역사의 터닝 포인트 변곡점에서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역사와 국민과 함께 한 소중한 자산이었다."

낙선과 의원직 상실 겪으며 힘겨운 적응

그렇게 뜨겁게 뛰어다니던 청년들은 스무 해가 지나 국회의원이 됐다. 학생운동을 주름잡던 그들에게도 국회 입성은 만만치 않았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전대협 1~3기 지도부 5명이 새천년민주당 간판을 걸고 출마했지만 임종석 의원만 배지를 달았다.

이번 선거에서 이범래 한나라당 후보를 1만3000여표 차 앞서 여유있는 승리를 거둔 이인영 의원은 2000년 구로 갑에선 1800표 차로 낙선한 경험이 있다. 오영식 의원은 당시 현직 의원이던 김원길 한나라당 후보를 8000여표 차이로 제쳤다.

16대 총선에서 대학 선배인 이성헌 한나라당 의원과 맞붙었다 패배한 우상호 의원은 17대에선 1800여표 차의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17대 총선에선 18명이 도전해 12명이 당선됐다. 1기에선 김태년·우상호·이인영·이철우 의원이 당선됐다. 2기에선 백원우·오영식·정청래·최재성 의원이, 3기에선 복기왕·이기우·임종석·한병도 의원이 국회에 입성했다.

이 중 이철우(서울시립대 84학번·전대협 1기 의장 정책비서)와 복기왕 전 의원(명지대 총학생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철우 전 의원은 05년 3월 선거 유세에서 "조중동이 20~30대는 투표하지 말고 놀러가라고 선동한다"고 연설한 것이 허위 사실을 퍼뜨려 상대 후보를 비방한 것으로 고발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복기왕 전 의원은 17대 총선 전인 03년 6월 선거구민 120여명에게 1인당 1만원씩 경비를 받고 청와대와 국회 관람을 주선해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돼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여의도통신
전대협 법안발의, 17대 평균치 2배 넘겨

전대협 출신 의원 10인의 입법 활동을 살펴보면 2007년 5월 말 현재 의원 1인당 법안 발의 건수는 평균 12.4건. 17대 의원 1인당 1년 평균 발의 법안이 4.9건(2005년 현재)임을 고려할 때 법안 발의 건수는 높은 수준이다.

최재성(동국대 총학생회장·전대협 2기 학원자주화투쟁위원장) 의원이 18건으로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했다. 정청래·이기우(성균관대 총학생회장·전대협 3기 수원지역 의장) 의원이 17건으로 공동 2위, 우상호 의원이 15건으로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임종석 의원은 3건, 백원우 의원은 5건에 그쳐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제정안 발의 건수를 보면 이인영·이기우 의원이 4건으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우상호 의원이 3건, 오영식 의원이 2건으로 뒤를 이었다. 김태년·백원우·임종석·정청래·최재성 의원은 1건씩 발의했다. 한병도 의원은 제정안 발의가 없었다.

법안 처리는 폐기와 대안폐기·수정가결·원안가결로 나눠 집계하되 폐기는 처리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발의한 법안 건수를 대안폐기와 수정가결·원안가결된 법안 건수의 합계로 나눠 처리율을 집계했다.

처리율 평균은 45.9%. 전대협 출신 의원들은 발의한 법안의 절반은 통과시킨 셈이다.

처리율이 가장 높았던 의원은 오영식 의원. 12건의 법안을 발의한 오 의원은 대안폐기 5건, 수정가결 6건, 원안가결 1건으로 모든 법안을 처리해 처리율 100%의 진기록을 달성했다. 임종석 의원이 66.7%(대안폐기 1건, 수정가결 1건), 우상호 의원이 53.3%(대안폐기 4건, 수정가결 2건, 원안가결 2건)로 그 뒤를 이었다.

처리율이 가장 부진한 의원은 이인영 의원(7.1%)이었다. 14건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 중 1건만이 수정가결됐다. 11건의 법안을 발의한 한병도(원광대 총학생회장·전대협 3기 전북지역 조국통일위원장) 의원도 대안폐기 1건, 수정가결 1건으로 처리율 18.2%에 그쳐 하위권에 들었다.

여의도통신
이를 토대로 <여의도통신>에서는 입법 점수를 매겨봤다. 법안 발의는 한 건당 1점으로 하되 제정안의 경우 개정안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든다고 보아 2점으로 계산했다. 처리율도 포함시키기 위해 대안폐기된 법안은 1점, 수정가결은 2점, 원안가결은 3점으로 계산했다.

이를테면 김태년 의원은 개정안 11건, 제정안 1건을 냈으므로 11+(1*2)=13점이 된다. 여기에 대안폐기 1건이므로 1*1=1, 수정가결 5건이므로 5*2=10해서 11점을 더한다. 김 의원의 입법 점수는 총 24점이 된다.

이런 식으로 전대협 출신 의원 10인의 입법 점수를 매겼을 때 1위는 이기우 의원(36점)이었다. 이 의원은 17건(개정안 13건, 제정안 4건)의 법안을 발의했고, 대안폐기 3건, 수정가결 3건, 원안가결 2건이라는 성과를 냈다.

오영식 의원이 34점으로 2위를, 우상호 의원이 32점으로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임종석 의원이 7점으로 최하위를 차지했고 백원우 의원이 10점으로 꼴찌에서 두 번째 순위에 올랐다. 이인영(20점), 한병도 의원(14점)도 10인 의원의 입법 점수 평균인 23.1점에 못미쳤다.

이기우 재산신고액 3565만원 가장 낮아

10인 의원의 2004년 평균 재산신고액은 2억131만원이었다. 17대 총선 당선자 299명의 평균 재산신고액 21억6591만원의 1/10 수준이다. 당시 가장 '부유했던' 의원은 재선의 임종석 의원. 4억9100만원을 신고했다.

2006년 평균 재산신고액은 2억5912만원으로 약간 늘었다. 평균 5781만원이 늘었다. 2006년 현재 가장 재산신고액이 큰 의원은 백원우(전대협 2기 연대사업국장) 의원이다. 2억7521만원에서 4억1141만원으로 2년새 1억3620만원이 늘었다.

재산증감폭이 가장 큰 의원은 김태년(경희대 총학생회장·전대협 1기 상임운영위원) 의원으로 -1031만원에서 1억9109만원으로 2억140만원을 늘렸다.

이기우 의원은 2004년과 2006년 모두 재산신고액이 가장 낮은 의원으로 집계됐다. 2004년 당시 -2222만원에서 5787만원이 늘어나 2006년 현재 재산신고액은 3565만원이다.

김태년·이인영·정청래 의원만 2004년 "이라크 파병중단"

한편 이들 의원은 이라크 파병 등 현안에 대해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4년 4월 13일간 단식투쟁을 하며 "이라크 전쟁은 침략전쟁"임을 알려 박수를 받았던 임 의원은 다음해 파병중단 결의안에는 서명하지 않아 비난을 샀다. 우상호 의원도 "당 대변인으로서 공식적인 논평 외 다른 입장을 밝힐 수 없다"며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 중단 결의안에 서명한 전대협 출신 의원은 김태년·이인영·정청래 의원뿐이다.

2005년 12월 이라크 파병 재연장 표결에선 김태년·백원우·이인영·임종석·정청래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오영식·최재성 의원은 기권했고, 우상호·한병도 의원은 찬성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누락으로 인한 정정

여의도통신은 법안 발의 건수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bill/)을 토대로 대표발의 법안을 조사했습니다.

이때 1인발의 법안이 빠지게 되어 오영식 의원의 경우 두 건의 제정안(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안 2005-10-28, 중소기업 사업전환 촉진에 관한 특별법 2005-09-09)이 누락되었습니다. 이 두 건은 모두 수정가결됐습니다.

따라서 처리율은 여전히 100%이며, 오 의원의 입법 점수는 41점으로 입법 점수 1위가 됩니다.


송민성 기자 ichae1982@ytongsin.com

덧붙이는 글 |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15호(2007년 6월11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15호(2007년 6월11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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