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아그리피나, 무엇이 서로 달랐나

[로마인이야기] '성군 세종'과 '폭군 네로'를 키운 부모들

등록 2007.06.25 09:57수정 2007.06.2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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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유학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산가족을 자처할 정도로 한국 부모의 자녀 사랑은 각별하다. 영어 교육과 유학 열풍이 얼마나 거센지, 기러기 아빠도 모자라 해외에 유학 간 자녀를 수시로 방문하는 '독수리 아빠', 교육비 송금도 벅차 자녀방문은 꿈도 못 꾸는 '펭귄 아빠'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다.

빠른 영어습득을 위해 아이의 혀 밑을 찢어주고 단 1센티미터라도 키가 더 크라고 성장촉진제까지 맞힌다는 보도를 듣고 있노라면 박수를 쳐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대략 난감해진다.

사회지도층은 여기에 한 술 더 뜬다. 룸싸롱에서 술 먹다 다친 아들의 한을 풀기 위해 폭력배를 동원한 재벌회장이 있는가 하면 둘째 아들이 세 번째로 맞이한 비공식 며느리의 미국 체류비를 비자금으로 지원해준 것으로 의심받는 전직 대통령도 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특히 사회지도층의 자식사랑은 도를 넘으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문제로 전이된다.

IOC위원으로 대한민국 스포츠, 특히 태권도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 받는 김운용씨. 2001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유치위원회가 IOC위원들에게 뇌물을 뿌린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솔트레이트시티 올림픽위원회가 김 위원 아들의 취업을 알선하는가 하면 그의 봉급까지 대납한 사실이 드러나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아들 관련 비리로 입길에 오르내린 차기 IOC위원장은 결국 태권도 국가대표 선발 비리에까지 연루되며 사실상 체육계에서 축출됐다. 김운용씨 문제로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지분이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는 한층 심각하다. 김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현철씨는 아버지 재임 기간 중 소통령이라 불리며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는 눈총을 받았다. 결국 김 전 대통령 임기 말, 한보그룹에 대한 산업은행의 특혜대출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사는 가운데 고위직 인사를 좌지우지하려 한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되며 구속되고 말았다. 김현철씨 문제가 불거진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실상 '식물대통령'으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권을 물려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식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차남과 삼남이 나란히 이권개입 의혹을 받으며 검찰 소환조사 끝에 구속됐던 것. 아들 문제 관련해 전임자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기는커녕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조선 세종과 로마의 네로: 현명한 임금과 폭군의 차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은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정신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척리(임금의 내척과 외척)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원칙을 세울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왕자의 난 때 동지로 활약했던 자신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에게 협유집권(挾幼執權, 어린 세자를 이용해 정권을 획책하려 함) 혐의로 사약을 내렸다. 차기 왕위가 처남들이 지지하는 큰 아들 양녕대군에게 세습되는 연공서열에 따라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능력 검증을 바탕으로 이뤄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첫째 아들 대신 셋째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신생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자식과 친인척에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현명한 임금이었다.

로마시대 미친 황제로 유명한 네로. 사실 네로는 그리스 문화에 조예 깊은 청년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수염 기르는 풍습을 쫓아 수염을 길렀고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과 쌍벽을 이루는 로마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키타라'라는 일종의 리라를 연주하며 자작시 노래하기를 즐겼다.

예술을 사랑했던 이 젊은이를 누가 미치광이로 만들었는가? 그 배경에는 권력에 눈이 먼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있다.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던 그녀는 협력자 비텔리우스의 지원 속에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와 전략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결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제도권에 진입한 것이다. 권력에 한발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주저 없이 제거했다. 황후 자리를 놓고 자신과 경쟁을 벌였던 파올리나를 추방하는가 하면 자신의 남편까지 독버섯으로 독살했다.

클라우디우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자 아그리피나는 불과 16세에 불과한 아들 도미티우스, 즉 네로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황후 시절 아들 키우기에만 열중하는 척했던 그녀는 황태후가 되자 서서히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식석상에서 늘 아들 옆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 회의도 포로 로마노 근처가 아닌 팔라티노 언덕 황궁에서 열게 했다. 자신이 기거하는 곳 주변에서 원로원 회의를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당시 아그리피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아들과 자기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을 동전의 도안으로 채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강제로 입힌 권력이라는 갑옷 속에서 네로의 내면은 쉴 곳을 찾지 못했다.

네로는 여자노예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을 뿐더러 어머니가 클라우디스 황제와 재혼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던 팔라스를 공직에서 해임했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왜곡된 형태로 표출한 셈이다.

결국 네로는 친구인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지며 어머니와 충돌한다. 어머니가 포파이아를 인정하지 않자 네로는 모정 대신 사랑을 선택한다. 해방노예를 시켜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몸부림치던 황제의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네로가 황제에 오르는 대신 자신의 꿈을 좇았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역사책에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그리피나와 같이 자신의 갈망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행위는 결국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다. 이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은 자기애보다는 파괴적이고 망상적인 집착이나 도취에 가깝다.

교육을 배우려면 '동물의 왕국'을 보라

한국은 현기증 날 정도로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현재 부모세대들은 보릿고개와 독재를 경험한 반면 자식세대들은 한국경제의 최대 호황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다. 각 세대 간 성장환경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하며 많은 기대를 거는 건 일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HSBC그룹의 조사결과 우리나라 60대 83%와 70대 64%가 은퇴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60대 17%, 70대 9%), 홍콩(60대 20%, 70대 30%)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물론 이를 대한민국 부모들의 유별난 문화적 성향쯤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소유한 집을 담보로 매월 연금 형태의 생활비를 받는 역모기지론이 유독 우리나라에선 크게 인기를 못 끄는 이유 역시 자녀에게 집을 물려주려는 성향이 강한 한국부모들의 특성에 기인한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한국부모들의 내리사랑은 고급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큰 밑거름이 됐다. 자신의 삶을 포기해가며 자식들 교육에 전력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세계를 호령한 박태환과 김연아 선수의 활약 역시 부모의 헌신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식들 과외비에 노후대책은 전무한 상태에서 늙어서도 자식들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는 지금 한국부모들의 모습은 비정상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이유가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지 아들을 통해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한국의 부모들은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지난 5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교육에 대해 배우려거든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했다. 어떤 동물이든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는 성심 성의껏 도와줘야 하지만 결국 양육에 있어 최종적인 목표는 자식의 홀로서기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부부나 연인이라면 몰라도 부모가 자식을 평생 자신의 수중에 붙잡으려 한다면 마침내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헌신과 관심은 부모의 미래를 좀 먹을 뿐이다.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노후가 불안정해진 부모는 자신은 물론 자식의 인생에게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영어교육, 유학 열풍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제2, 제3의 네로들이 무수히 많은 듯하다. 한국의 부모들이 유명 특목고나 미국 명문대 진학 방법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TV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육아방법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는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짓기 대회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로마인이야기 글짓기 대회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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