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과 종교, 관용의 미덕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7.06.28 20:01수정 2007.06.2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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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신앙생활은 네안데르탈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3만5천년에 이미 인류는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인식, 즉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 '죽음 이후'란 미지의 세계에의 두려움,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현상 등이 인간을 스스로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원시 종교의 형태로 발현되지 않았을까.

인간의 지적 능력은 선사시대 이후 이른바 '문명'이 시작되면서 비약했고, 각 문화권마다 겉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여러 종교가 생겨났다. 오늘날에도 세계를 여러 문명권으로 나눌 때, 오히려 민족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종교가 아닐까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어떠한 것일까. 이단으로 몰려버리면 산 채로 화형을 당하던 중세 유럽만 생각해보아도, 신앙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폭 테러에서도 신앙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을 볼 수 있다.

오로지 절대자 혹은 신앙을 위한 현세의 삶은 곧 피안(彼岸)에서의 영원한 삶이라고 믿는 자가 죽음을 두려워할까. 유감스럽게도 이때의 믿음은 지배자에겐 더 없이 소중한 지배도구로 전락하기 한다.

몇 년 전 파키스탄 대지진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물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러한 재앙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에서도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볼 수 있다. 망자에게는 신의 곁으로 갔다는 축복을 줌으로써, 살아남은 자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는 동시에,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또 인간에게서 종교의 의미는 비단 개인적 차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로 문명을 나눌 정도로 종교는 한 사회의 모습을 결정해버린다. 이는 단순히 믿는 신이 다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종교가 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할 뿐만이 아니라 효율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의 역할도 하는 고도화된 사고·신념 체계이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사회를 통합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체제였다. 또 조선 건국 이후 유교(물론 유교를 종교로 보기는 어렵지만)는 아주 세련된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고, 현세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주며, 때로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도 해준다. 또 고도의 사고·신념 체계로서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통합하는 가르침을 준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종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종교의 가르침을 잃으면 자신도 잃는다는 사실은 종교를 논함에 있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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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종교 문제가 로마 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특히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과 유대교를 모태로 하는 기독교 사이의 경쟁은 종교와 문화의 충돌을 넘어, 종교와 인간 사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기독교가 승리하는 과정이 로마 제국의 붕괴와 맞물리게 되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도 '배교자' 율리아누스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가 일신교의 폐해를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라고 했었다. 일신교인 기독교에서는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자는 '이교'나 '이단'이 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데, 일신교인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다. 다른 신앙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신앙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력이 미미했던 제국의 전성기는 다문화·다종교·다민족의 보편제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국 말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광범위한 침투는 관용과 개방으로 일관하여 30만이 넘는 신을 가졌던 로마인을 바꾸어 놓았고, 결국 보편 제국의 성격을 잃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 1000년과 고대 그리스-로마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를 생각해 본다면, 기독교로 인한 보편제국의 상실은 시간의 횡적 흐름이 인류의 진보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저자가 일신교와 다신교 사회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로마 신처럼 인간을 보좌해주고 수호해주는 신이든,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을 인도하고 구원을 주는 존재이든, 절대자는 현대에 와서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같은 신앙을 같지 않을뿐더러 적어도 다른 종교를 용인하는 다신교도가 아니라는데 있다.

모든 인간이 전성기의 로마인처럼 혹은 적어도 15, 16세기 투르크만 같았어도 종교로 대립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분쟁은 전쟁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한다. 유럽,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의 기독교(구교와 신교를 합해서)와 중동, 북·중부 아프리카, 소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의 접경지역까지의 이슬람. 각각 10억이 넘는 인구간의 대립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종교 간, 혹은 종파 간 대립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종교 간,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갈등은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축구대표 감독의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말에 비기독교인들이 흥분하고, 우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있는 단군상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 학교 교정을 거닐다 '예수님을 믿느냐'라고 하며 접근하는 사람 때문에 불쾌해지기도 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의 신경질적인 적대감에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로마가 다신교 사회, 즉 믿는 신이 여럿이 아니라 타인의 종교에 관대한 사회였던 이유를 단지 인간을 보좌하고 수호했던 올림푸스의 신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기독교의 신을 생각해 본다면 주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신교 사회였지만, 그리스인의 신앙을 제재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가 있었다. 항복해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로도스의 그리스인들이 결국 항복을 택한 사실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로마가 다신교 사회로 보편 제국을 이루며 번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시 '관용'이다.

일례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란을 막고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은 종교를 믿음의 문제임에 앞서 사회·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비기독교인의 관점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관점이 남는다.

'관용'은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므로 그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비기독교로서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을 지지한다손 치더라도, 기독교의 시각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거나 덮어놓고 '그건 너희들 시각에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이미 일신교도에겐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없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져 버린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 종교 갈등은 바로 남에게 요구하는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즉, 자신의 신앙을 존중해달라고 하면서 남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거나, 남에게 관용의 태도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타종교에 전혀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관용'이라는 미덕이 너무나 부족한 게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는 때론 한 사람의 전부가 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은 각각의 스타일 즉, 그것을 포기한다면 이미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종교는 한 신도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일신교도에게 어떻게 당신만 진리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신교도가 '나의 신만이 진리이다'라는 명제를 포기한다면 이미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일신교는 자신만이 진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진리는 삶에 관철되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신교도에게 종교는 현실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종교를 믿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신교도의 바로 이러한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종교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떤 믿음을 가질지에 대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침해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유 중에 단연 으뜸은 바로 종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종교는 고도화된 사유 체계이다. 종교의 자유로운 선택과 선택한 종교에 대한 타인의 이해와 배려는 인권 보장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바로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로마 전통 신앙과 기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지금 우리 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했다면 이제 '관용'이 남았다. 기독교인인 축구대표 감독의 언행도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예수를 믿으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교회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남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래야만 축구대표 감독과 신념 있는 교인의 존재와 인격을 존중할 수 있다. 또 절에 다니고 단군상을 세우는 것도 단지 나와 다른 신앙을 가졌을 뿐이며, '믿음이 없는 자에게 지옥을!'이 아닌 '그들에게도 축복을'이라 기도해야 비기독교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과 믿음이 다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일신교인 기독교의 폐해로 로마가 멸망시키고 중세 암흑시대를 가져왔다는 따위의 논리는 지금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문제는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관용이 없던 시대가 어떠했는지만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 그 종교의 속성은 어떠하냐는 다분히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위대한 보편제국을 이룩했던 고대 로마인의 '관용'이란 미덕에서, 우리는 종교 갈등을 넘어 사회 화합과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종교 #관용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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