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생일잔치 가는 길에

<엄마하고 나하고 20회>

등록 2007.09.11 10:29수정 2007.10.0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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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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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합장을 하고 스님 법문을 듣는 어머니 ⓒ 전희식

▲ 부처님오신날 합장을 하고 스님 법문을 듣는 어머니 ⓒ 전희식

5월도 중순을 넘어 선 장계지역의 들판은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모를 심는 논들이 보였다. 고추밭에도 지지대가 높이 박혀있고 끈으로 두벌 묶음을 하는 농부의 손길이 분주하다. 조심스레 트럭을 운전하는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크게 들떠 보였다.

 

오늘의 나들이를 위해 조마조마하며 여러 날을 준비해 온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듯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에 안부를 묻고 옛 기억을 되살려 내시느라 어머니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자동차를 더욱 천천히 몰았다.

 

"우리집 씬나락은 내가 다 쳤다 아이가. 씬나락을 잘 쳐야 모 찌기도 좋고 모 심기도 좋은기라. 내가 씬나락 잘 친닥꼬 동네서 불리 댕깃따. 솔솔 씬나락 잘 친닥꼬."

"창문 닫지 마라. 이기 머가 춥딱고 그라노."

 

"지금 우리 못자리 물 떼그라. 그래야 뿌리가 어시지는 기다. 뿌리가 어시져야 나락이 충실 해 지는기라."

"이 동네 모꾼들은 다 어디갔노? 모 심다말고 어데 갔길래 하나도 안 보이네?"

 

이앙기로 모 심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어머니는 너른 들판에 못줄 잡는 사람도 없고 모 심는 사람도 없는 것이 이상했나보다.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내가 뭐라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혼자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계남면에서 장수읍으로 넘어가는 국도를 따라 '에프티에이 결사반대'라는 장수군 농민회의 노란 깃발이 죽 꽂혀 있는 걸 보셨다.

 

"저거는 먹꼬? 새 쫒을락꼬 꼬자난나?"라고 하셔서 글자를 읽어보라고 했더니 바람에 펄럭거려서 잘 못 읽는다.

 

읽는다 해도 영어를 모르니 '결사반대'만 읽었을 것이다. 노인들만 있고 문맹자도 만만찮은 농촌 시골길에 농민회에서 만든 영어로 씌어진 '에프티에이(FTA)'라는 남의 나라 말 깃발이 참 낯설어 보였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몇 가지 수단 가운데는 다자간무역협정과 국가별 자유무역협정 체계가 있는데 그 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국제통화로써 기능하는 달러와 세계어로 행세하는 미국말(영어)이다. 우리나라 사교육비의 절반이 영어공부에 들어가고 그 규모는 1년에 15조원을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반대하는 농민회라면 모국어 사용문제는 물론 종자에서부터 각종 농자재나 농기계 등 미국에 예속이 심화되고 화석에너지에 종속되는 화학농사법을 극복해 나가려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절에는 동사섭(同事攝) 수련을 지도하시는 스님이라 그런지 오랜 동사섭 도반들이 많이 와 있었고 어머니를 보고 다들 극진하게 인사를 하고 용돈까지 봉투에 넣어 주는 사람이 있다 보니 절이라고는 난생 처음이지만 어머니는 해 보라는 대로 합장도 하고 손뼉도 치면서 금세 잘 어울리셨다.

 

절 입구에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인자 여기서부터는 '중놈 중놈' 그카지 마시소이?"라고 했더니 눈을 흘기면서 "찌랄하고 있네. 앙그라지이. 누굴 밥티로 아나. 인자 '스님 스님' 그캐야지"하셔서 한참 웃었다.

 

스님이 법문 하시는 것을 나는 못 듣는 어머니를 위해 계속 종이에 적어서 전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11 10:2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엄마하고 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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