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대관령'

옛 사람들의 발길 따라 세상과 소통하는 곳

등록 2007.11.17 18:57수정 2007.11.18 15:31
0
원고료로 응원
a

경포호에서 바라본 대관령의 겨울 경포호에서 바라본 대관령. 산 허리를 타고난 도로가 용의 승천로처럼 꿈틀댄다. ⓒ 최백순


대관령에는 신이 살고 있다. 천 년 동안 강릉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아득한 옛날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935년 명주의 호족 왕순식이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하러 대관령을 넘어가면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대관령은 신과의 인연을 천 년째 이어오고 있다.

대관령에서 시작한 물이 흘러 내를 이루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대천 주변은 해마다 5월에 단오제가 열린다. 대관령의 국사성황신을 모셔다 굿을 하고 가정의 안녕, 바다와 땅의 풍년, 사업의 번창, 자식의 출세를 기원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자동차를 새로 사면 대관령을 향해 세우거나 대관령 중턱에서 무사고를 바라는 고사를 지내고,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무녀와 함께 산신당에 들러 굿을 한다. 수능시험이 있을 때면 선생님들도 음식을 장만해 산신당과 성황사에 제를 올린다. 또 시장이나 산림청 관계자들은 산불을 막아달라거나 가뭄에 기우제를 올려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이처럼 대관령은 강릉사람들에게 정신적 귀의처가 되고 있다.

a

단오굿당 남대천변에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을 모셔두고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린다. ⓒ 최백순


한편으로는 넘어 버리고 싶고 극복해 버리고 싶은 장애와 고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태어나 대관령 산빛이 푸르렀다가 붉어지고 흰눈으로 덮이는 것을 수 없이 보아 오면서, 저 고개를 넘기만 하면 팔자가 펼 것 같은 희망을 안고 살아온 이들이 강릉지방 사람들이다. 바닷가에서 소금기 섞인 추운 바람을 맞으며 양미리(겨울철 대표 어종 중 하나)를 따던 이나, 김장 배추를 리어카에 싣고 시장골목에서 시린 손 부여잡고 있던 이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내 자식은 대관령 너머 대학 보내고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관령은 강릉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품이 되고 때로는 삶에 힘겨워 술 마시고 욕을 퍼부어도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이 됐다. 인간의 능력 밖 그 무엇에 의지하고 싶을 때 무당과 함께 산신당을 찾아 조상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일 게다. 강릉 사람들은 대관령을 자주 찾는다. 옛날 두 다리와 말 한필이 전부일 때 오르던 옛길,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생기면서 만들어졌던 대관령도로. 그곳에는 산 구비마다 전설이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겨울철 진상품 나르던 시절, 앞서 눈 밟던 백성들 모습 눈에 선해


a

대관령 옛길 표지석 대관령 중턱에 표지석이 서 있다. '반정'이라하여 길의 중간지점을 뜻한다. ⓒ 최백순

대관령 옛길에는 재미난 지명도 있다. 대관령이 험한 까닭에 이 길을 오가던 관원들이 넘어지며 구르며 내려왔다 하여 '대굴령'이라고도 하고 굴면이, 원읍현이라는 말이 생겼다. 답설군, 가마군의 전설과 풍습도 전해진다. 원읍현은 원님이 울고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원울이재라고도 불린다. 대관령의 옛길로 윗굴면이에서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작은 재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이 원읍현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강릉은 영해의 동녘에 있는 큰 도회지다. 신라때는 북빈경이었으며, 동경이라고도 불렀다. 김주원 공이 봉을 받은 이래 꾸민 장식과 사치한 의관이 화려하고 특출하여 서울과 서로 비슷하였으며, 또한 풍속이 문교를 숭상하여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로서 사장에 몰려드는 자들이 줄을 이어 늘어설 지경이었다.

풍속이 돈후하여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하여 기교가 없었다. 어업과 쌀의 생산이 풍요로워 비단 산천의 아름다움이 동방에서 으뜸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에 관리된 자들은 대개 여기를 못잊어하여, 떠날 때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으므로 원읍현이 생겨 지금도 있으니 대개 그 증거가 될 만하다." (허균, <성소부부고>)

대관령 고개를 넘어올 때는 좋은 벼슬자리 두고 이 험한 고개를 넘어 조그마한 곳에 벼슬살이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지만,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 대관령에 많은 눈이 와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더라도 나라의 진상품을 나르거나 관원행차로 부득이 대관령 눈길을 넘어야 했을 때 앞에 서서 눈을 밟아 주던 답설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제설차량들이 그 일을 대신하지만 당시에는 허리까지 쌓인 눈을 앞장서서 헤쳐야 했던 백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근에 새로 뚫린 도로가 나기 전에는 기후변화가 심하고 안개가 짙게 끼며 잦은 폭설로 길이 두절되기도 했다. 피서철에는 차량들로 꽉 막혀 버리곤 했던 대관령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쉽게 넘을 수 없는 험준한 고개임에 틀림없다.

대관령 중턱에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주막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이 길을 나는 듯 뛰어 다닐 때 허름한 주막에는 나이 드신 할머니가 솔잎을 넣어 만든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막걸리 정도는 마셔도 흉이 안됐다.

그리고 그 주막을 만든 이병화에 대한 기록이 어흘리 대관령 중허리 8Km 반정 아래 약 300m 지점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문을 해석해 보면 "기관 이병화가 끼친 은혜를 잊지 못해 세운 비석. 100꿰미(대략 1000냥, 벼 500석 정도)의 돈으로 밑천을 삼아 이자를 늘려 이곳에 점막을 열었다. 이런 사유로 생활하든가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쉴 수 있고, 거주하는 사람을 위한 오두막집이 마련되었다. 이를 작은 돌에 새겨서 영원히 영예로움을 기린다"는 내용이다.

a

대관령도로준공기념비 옛길 표지석 위 도로가의 암석에 준공 도로개설과정을 기록해 놓았다. ⓒ 최백순

그렇게 전설 따라 산굽이 돌고 계곡을 건너서 산을 오르면 대관령 옛길 표지석이 나오고 옛대관령도로가 나온다. 터널로 시원스레 만들어진 새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관령을 넘는 유일한 도로였다.

조선의 운명이 다하고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두 다리와 짐승의 힘이 아닌 네 바퀴 자동차와 근대 문명의 유입의 통로가 개척되던 시대를 만난다. 대관령 옛길 표지석에서 도로 오른쪽 바위벽에 대관령 길이 아닌 도로가 만들어진 역사가 기록돼 있다.

대관령 치도계획에 참여했던 후쿠오카현 출신 일본인 시미즈와 그의 동생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은 1913년 9월 착공하여 1917년 8월 30일에 완공한 대관령 도로 개통의 주역들이다. 이 공사는 본래 1916년 3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1916년 8월 10일 대홍수로 말미암아 평창, 강릉간 공사구간이 심히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따라서 1년 5개월의 공기가 연장되고 무려 20만 엔의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된 난공사였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홍수로 상당 구간이 유실되자 오히려 분발하여 복구에 진력했으나 불행하게 병이 나서 시미즈가 죽자 그의 동생에게 명하여 공사를 계속하였다는 내용이다.

대관령도로는 일제 조선침략정책의 하나인 치도공사로 행해졌지만, 그것을 떠나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려고 애를 쓰다가 병사한 시미즈와 형의 유지를 받들어 공사를 완성한 동생의 이야기도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a

단오산신제 신목을 베기전 산신제를 올리고 굿을 한뒤 산에 올라 국사 성황신이 접한 나무를 베어서 성황사앞에서 오색천을 장식한다. 산신제 모습 ⓒ 최백순


예전에는 누구나 집에서 굿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산길을 올라 대관령 능선 밑에 자리한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산신당과 성황당에 이른다. 고려시대에는 대관령을 '대현'이라 했다. 

"태조가 신검을 토벌할 때 순식이 명주로부터 그 군사를 거느리고 회전하여 이를 격파하니 태조가 순식에게 말하기를 "짐이 꿈에 이상한 중이 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이튿날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는 그 몽조로다"하니, 순식이 말하기를 "신이 명주를 떠나 대현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가 있었으므로 제를 마련하고 기도하였는데 주상의 꿈꾼 바는 반드시 이것일 것입니다"하자 태조가 이상하게 여겼다." (<고려사>)

오늘날 강릉단오제는 이 기록으로부터 대관령 산신과 국사성황신을 받들어 모시게 되는 근거를 찾는다.

a

굿하는 무속인들 산신당앞에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하고 있다. 왼쪽 천막밑 용왕당에서도 굿이 한창이다. ⓒ 최백순


산신당에 모신 김유신 장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변방지역에 말갈족이 자꾸 침입하여 괴롭히자, 강릉 화부산 밑에 장군이 머물면서 적을 퇴치한 게 계기가 됐다. 이후 평화를 되찾자 이 지역사람들이 대관령과 화부산 밑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장군을 추모하게 되었다.

성황사의 범일국사는 826년에 당나라로 가서 불법의 도를 얻어 돌아와 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서 굴산사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중생들에게 불법을 설파했다. 그후 열반하여 대관령 성황신이 되었다 한다. 강릉사람들은 음력 5월5일 단오날 신목을 모시고 강릉 남대천에서 풍년과 시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을 올리는 주신으로 받들고 있다.

a

굿하는 무녀 징소리에 맞춰 신을 청하고 있다. ⓒ 최백순


a

신과의 대화 무녀와 굿을 받는 이가 대화를 주고 받고 있다. 손에 들린 흰천은 매듭을 푸는 것을 의미하고 깃발은 오방기로 하나씩 뽑아보게 하여 점을친다. ⓒ 최백순


징과 장구 소리가 산 자락을 감싸고 산신당 성황당 용왕당 칠성당에 자리한 무속인들이 신과의 대화에 빠져있다. 장구 장단에 맞춰 경문을 읽는가 하면 오방기를 뽑아가며 무당의 몸을 빌린 동자신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건드린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여,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
"예, 큰 부잣집이라 부인을 여럿 두었다 하던데요."


무녀는 아이의 목소리로 앙증맞게 남의 집안 과거사를 하나 둘 들추고 굿을 청한 이는 신기한 듯 예! 예! 호응한다. 50은 넘었을 듯한 무녀의 표정은 더욱 재미있다. 할머니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리듯 몸짓하며 귀여운 표정에 웃음이 절로난다.

어떤 연극이나 드라마보다 재미있다.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둘의 진지한 대화는 계속된다. 다른 굿판에서는 징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신 내림이 한창이다. 칼과 창을 쥔 손이 하늘로 들려지고 제자리 뛰기가 신명난다. 예전에는 누구나 집에서 굿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징소리도 소음이라 하여 산속으로 밀려나 굿당을 두고 이곳 산신당을 찾는다.

a

산신당의 겨울 안개가 살포시 내려 앉은 산신당에는 신이 머무는 것처럼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 최백순


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신명나게 두드리고 춤추고 조상의 한을 풀고 살을 풀어 앞으로의 삶이 원만하고 소원성취하기를 기원한다. 대관령 자락에서 바다와 땅을 헤집으며 사는 이들이나 신의 제자가 되어 타인의 인생의 꼬인 곳을 풀어주며 사는 무속인들의 모습에서 강릉사람의 얼굴을 본다. 살아서는 모산 학산이요 죽어서는 성산(사굴산 아래 학산엔 사람들이 터를 잡기 좋은 땅이 많고, 대관령 아래 학산에 명당 자리가 많다는 뜻)이라는 옛말처럼 살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 대관령.

대관령에는 건강한 아들 낳게 해달라고 삼신할머니께 치성 드리고, 솔잎으로 부정 막고 일년농사 자식건강 무병장수를 빌던 칠성당이 있고 용왕 산신 국사성황신이 머물고 있다.

대관령이 흘려보낸 물을 먹고 농사를 지으며 신에게 감사할 줄 알았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돌아가 영원히 머무는 곳. 그래서 삶이 힘겨운 날, 그리움이 커지는 날 사람들은 대관령에 숨어든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기 응모


덧붙이는 글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기 응모
#대관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로하면 바로된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렇게 어렵게 출제할 거면 영어 절대평가 왜 하나
  2. 2 궁지 몰린 윤 대통령, 개인 위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나
  3. 3 동네 뒷산 올랐다가 "심봤다" 외친 사연
  4. 4 '파묘' 최민식 말이 현실로... 백두대간이 위험하다
  5. 5 헌재는 지금 5 대 4... 탄핵, 앞으로 더 만만치 않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