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호 열차를 타고 떠난 여행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안나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7.11.23 13:45수정 2007.11.2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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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야! 아빠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느리고 복잡한 통일호를 타고 가며 엄마와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포항에서 출발해 경주까지는 '동해남부선', 경주에서 영천까지는 '중앙선', 그리고 대구까지는 '대구선'이라는 것도 기차에 올라서야 알았다. 차장 아저씨의 친절하고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지루할 것이라는 걱정을 가시게 하는구나.


결혼 20년 만에 엄마와 동행한 2박 3일의 이번 여행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 같다. 더구나 외할머니 생일을 기념하여 이모할머니까지 모시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나연이, 다연이와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네가 빠진 공간이 너무 크고 허전하더구나. 엄마도 네 이야기를 자주 하셨거든….


엄마와 아빠는 지난 10일 집에서 출발하여 서대전에서 글을 쓰는 친구와 만나 점심과 차를 마시며 즐거운 대화시간을 갖고 부산 이모 집에는 저녁에야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이모랑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지. 네 안부는 이모가 제일 많이 묻더구나. 하긴 네가 갓난아이 때부터 누구보다 예뻐했으니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이튿날 아침 외할머니 생일을 축하하는 너의 전화는 가족 모두를 기쁘게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아빠가 대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이모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첫 목적지인 경주로 향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외할머니와 이모랑 함께하는 여행이어서인지 엄마는 무척 기뻐하셨고 아빠도 약간의 흥분이 일더구나.


외할머니가 복이 많은 분이셔서 그런지 날씨가 좋지 않다는 기상대의 예보에도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맑은 날이 기다리고 있어 좋았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 백반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포항제철을 끼고 돌아 ‘대게’로 유명한 영덕을 거쳐 ‘평해’의 월송정으로 향했다. 십리에 달한다는 소나무 숲이 장관이더라.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월송정은 옛날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많이 찾았다는구나. 삼국시대에는 네 명의 화랑이 송림에서 자주 놀았다 해서 ‘사선’이라고도 했다고 하고, 또 중국의 '월'나라에서 솔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향전이 내려오더라.


동해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국도를 달리는데, 코를 스치는 바닷냄새도 좋았다. 월송정에 오르니 시원하게 펼쳐지는 동해바다는 피곤한 몸을 풀어주었고 “야! 시원하고 좋다!”라며 연속 탄성을 지르는 엄마를 보는 아빠 마음은 너의 상상에 맞기겠다.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지겹지 않을 월송정은, 돌아올 때 다시 들르자고 약속하고 백암온천으로 향했다. 첫날의 목적지인 백암온천에는 어둑어둑해서야 도착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축젯날이어서, 밤 공연을 위해 야외무대를 설치하고 있더구나. 너무 무리한 여행을 피하기 위해 일찍 저녁을 먹고 가볍게 온천을 한 뒤 이모부와 내일의 스케줄을 상의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은 울진 성류굴과 불영계곡을 가기 위해 어제처럼 해안선을 끼고 북쪽으로 향했다. ‘평해’를 지나 망향해수욕장이 있는 울진 망향정에 도착하니 합죽선을 펼친 듯한 동해바다와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수평선을 보며 모두가 탄성을 질렀단다.


수평선 위의 파란 하늘이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를 품은 듯하고,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보고 있으니 옛날 사람들이 왜 배를 타고 멀리 나가기를 꺼렸는지 이해가 가더구나. 멀리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 웅장한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들었거든….


파도가 높아 나연이랑, 다연이랑이 수영을 못해 아쉬웠지만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로 하고 성류굴로 향했다. 굴 입구에 있는 넓은 호수도 시원해서 좋았고, 힘들게 천 년을 견뎌왔다는 느티나무는 끈끈한 우리 민족의 혼과 기백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임진왜란 때 백성 오백여 명이 왜군을 피해 숨었다 희생당했다는 성류굴에 얽힌 슬픈 사연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성류굴 탐사를 마치고 불영계곡으로 향하는 S자 형의 산길에서는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가족 모두가 “야!” 하며 탄성을 질렀단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시원한 막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시간 때문에 아쉬웠던 망향정을 들러 보는 것으로 호텔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인데 오후에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침부터 허전함이 다가왔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백암온천을 뒤로 하고, 시간에 쫓겨 다 둘러보지 못했던 월송정을 향해 차를 몰았다.


올라갈 때는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사장과 시원한 바닷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갔는데, 오늘은 백두산 줄기인 태백준령을 오른쪽으로 끼고 내려왔다. 동네를 지키는 천 년은 되었음직 한 느티나무와 간간이 경운기가 오가는 고즈넉한 산동네를 바라보다 코를 스치는 흙냄새에 취해 '고향의 봄'을 부르던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간이 없어 아쉬워 했던 월송정에 다시 들러 푸른 동해바다와 솔 향에 마음껏 취하며 엊그제 느끼지 못했던 옛 선조들의 체취를 만끽하고 TV 드라마로 유명해졌다는 ‘강구’ 항도 둘러보았다.


참! 너도 우주에 관심이 많지. 빡빡한 시간을 쪼개 화석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수십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해서 몇 번의 지각변동을 거치면서 인간이 나타나기까지 동식물의 화석과 공룡의 뼈가 많이 진열되어 있더라.


그 중에도 엄마와 아빠의 발을 제일 오랫 동안 머물게 한 곳은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다양한 보석의 원석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진열대였단다.


나이가 4-5천만 년이고 옛사람들의 부적으로도 쓰였던 호박, 특히 소나무에서 흘러내린 송진에서 벌레가 죽어 굳어버린 맑고 영롱한 황색의 호박을 보며 자연의 신비로움을 또 한 번 실감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원석과 화석들이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더구나. 진열장 위의 설명문을 꼼꼼히 수첩에 메모하는 학생들을 보니, 수능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을 너의 모습이 떠오르더라.


시간이 없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경주로 향했지. 경주 보문 관광단지와 해돋이로 유명한 토함산 등 신라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마주보며 서 있는 다보탑과, 무영탑이라 불리기도 하는 석가탑에서 천 년을 유지 할 수 있었던 신라사람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었다. 남녀의 슬픈 사랑과 기다림의 안타까움 속에 묻혀 내려오는 무영탑에 얽힌 이야기는 만나서 해줄게….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여러 번의 보수작업으로 자연의 미가 퇴색된 석굴암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자국어로 안내해주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을 보니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더구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 너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우리 세 식구끼리 다시 한번 오자고 엄마랑 약속했다. 어때 좋지?^^


경주를 둘러보며, 우리도 외국여행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선조 들이 땀을 흘리며 이루어 놓은 훌륭한 문화 유적지를 먼저 돌아보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장차 외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을 터인데 될 수 있으면 우리의 혼이 담긴 유적지부터 찾아보도록 해라.


얼마나 좋으셨는지, 차만 타면 멀미부터 하시던 엄마도 멀미가 난다든가 어지럽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셨다. 너도 좋지?^^ 이번 여행을 계기로 고질적인 엄마의 멀미도 멀리 도망갔으면 좋겠다.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여행하는 날도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경상도 사투리가 귀를 따갑게 하는구나..


그렇지만, 꼭 듣기 싫은 것만은 아니다. 재잘대는 승객들의 입과 다양한 표정을 쫓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대하는 통일호 열차의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와 통학하는 학생들이 떠드는 것을 보니 학창시절 수학여행 가며 친구들과 떠들던 추억이 떠오르는구나.


정겨우면서도 어수선한 차내의 소음과 레일의 매듭에서 규칙적으로 들리는 '덜커덩’ 소리가 하모니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해주는구나. 혼자 기차여행을 할 때 창밖 풍경과 함께 감상할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이번 가족여행의 의미를 사진과 함께 글로도 남기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렇게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새벽쯤에야 집에 도착할 것 같은데 여행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고 새로운 내일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겠다.


창 밖의 산들이 검게 변하며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아빠도 쉬고 싶구나.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검붉은 태양은 내일 아침에 집에서 만나겠지.. 그럼, 이만 다리 좀 펴고 눈 좀 붙여야겠다. 혹시! 아니? 꿈속에서 너를 만날지^^… 안녕!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2007.11.23 13:4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동해 #불영계곡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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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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