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망신(廢家亡身), 절대 무섭지 않았던 이야기

[자전거 세계일주 45] 멕시코 소노라 사막

등록 2008.01.23 15:28수정 2008.01.3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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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보기만 해도 침이 마른다. ⓒ 문종성

▲ 사막 보기만 해도 침이 마른다. ⓒ 문종성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패잔병처럼 다시 돌아온 산 루이스(San Luis). 인연의 끈이 악어가죽만큼이나 질겨 보인다. 자전거 가게 주인이 날 보더니 반색하며 웬일인가 한다. 사정을 설명하니 웃기만 하는 그. 재차 출발을 위해 타이어 폭을 1.5인치짜리를 쓰다가 2.125인치로 바꿨다. 속도를 포기하는 대신 펑크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고자 함이다. 아무래도 단위 면적당 압력을 덜 받는 넓은 타이어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길을 다시 오며 똑같은 풍경을 보았다. 하지만 타이어를 바꾼 후 속도는 20~30% 가량 떨어졌다. 오후 내내 쉬지도 않고 밟았는데도 50km 채우기가 벅찼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간 미국 사막만 생각해서 그래도 중간에 뭔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사막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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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풍경 거친 습속의 자전거 여행이 뭐가 좋다고 떠나왔는지. ⓒ 문종성

▲ 건조한 풍경 거친 습속의 자전거 여행이 뭐가 좋다고 떠나왔는지. ⓒ 문종성

폐가에서는 도저히 못 자겠다

 

오후 5시가 되자 급격히 해가 기울더니 눈에 띌 정도의 속도로 그대로 땅 아래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그로부터 30분 후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할 수 없이 후미등을 켠 채로 왕복 2차선의 도로를 자전거를 민 채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뒷바퀴가 또 펑크가 난 것이다.

 

아, 지독한 펑크의 악몽이여! 멕시코 들어오자마자 너무 고생이 많은 거 같아 순간 벼락같이 화가 났다. 저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주위엔 불이라곤 가끔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이 전부였다. 속도가 더욱더 느려졌다. 주위는 진한 블랙커피마냥 깜깜해졌다. 더구나 도로가 매우 협소한 2차선이었으므로 수리할 수도 없었다. 차를 세워보겠다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았지만 '여긴 멕시코야'라는 듯 무심코 쌩쌩 지나쳐 버린다.

 

하염없이 걸었다.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적막해서 더 음침한 사막 한가운데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정말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손전등을 비춰 시계를 봤다. 이럴 수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아날로그의 시침은 6에 머물러있었다. 이제 겨우 6시란 말인가. 이건 전혀 6시의 어둠이 아니다. 밤 12시나 새벽 1시의 어둠이라고 해야 옳은 먹물을 뿌려 놓은 하늘이다.

 

저 멀리 차량의 불빛이 비치고 내 눈에 들어오면 순간 눈이 부셔 시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를 지나친 차량의 불빛을 통해 길 끝을 보자면 마치 4차원의 공상세계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차량의 불빛을 통해 오른편에 험하게 파인 살을 드러낸 폐가들을 볼 수 있다. 한 번 거기서 자볼까 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왼쪽으로 펼쳐진 국경 쪽으로 갔다가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별안간 총알 세례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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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니 차라리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던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기도... ⓒ 문종성

▲ 이쯤되니 차라리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던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기도... ⓒ 문종성

그래도 폐가에서 잘 수밖에…

 

진심으로 나는 겁이 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나무 한 그루나 작은 흔들림 하나가 예사로운 공포가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분위기 자체가 담력 테스트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국경 경계 쪽에서 불빛이 비쳐졌다. 아득하게 먼발치에서 보자니 헬리콥터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불빛이 가까이 다가올 때 땅에 바퀴를 굴리고 나타난 차량임을 알 수 있었다.

 

'미국쪽 국경 순찰차인가?'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차가 내 눈에 들어왔으므로 분명 국경 경계 안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비포장 도로다. 아니 모래밭이다. 왜? 설마 강도? 갑자기 맥박이 우당탕탕 천둥치듯 요란스레 울려댔다. 그 차가 국경에 기댄 채 나와 같은 위도 상에 섰다.

 

입에서 자그마한 욕이 흘러 나왔다. 나는 정신을 더욱 집중하려 했지만 도무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럴 때 누가 신고하면 경찰차가 금방이라도 잘 오더니. 여긴 내가 곧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가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 암울하고도 살 떨리는 순간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작정 전조등을 비친 채 걸어갔다. 다행히 그 차는 나를 따라온다거나 하는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불을 끈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처지가 코가 석 자다. 걷는 속도 평균 4.5km. 표지판에 다음 도시까지는 145km. 혹시나 중간에 운 좋게 휴게소가 있다 해도 20km가 떨어져 있다면 이 위험한 거리를 5시간 가까이 걸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차로는 10여 분이 조금 넘게 걸릴 거리인데….

 

'미쳤어, 난 미쳤어. 암, 미치고 말고. 젠장할.'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담대함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정보 부족에 의한 무지함이었다. 물론 사막이라는 건 알고 왔지만 그에 맞는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부터 멕시코는 미국이 아닌 멕시코로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홀로 미국 모하비 사막의 5배 면적이 되는 소노라 사막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일 온전한 나로 햇빛을 볼 수 있을까.

 

차량들이 비춰주는 전조등으로 흉물스럽기까지한 폐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내 목을 감겨 당기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기를 내뿜고 있었다. 더구나 11월의 사막의 밤은 매서운 바람으로 추위를 만들었다. 이제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밤새 이 춥고 위험한 거리를 걷느냐, 눈 딱 감고 좀비처럼 폐가로 들어가느냐. 무엇이라 해도 최악의 선택이 될 게 분명했다. 하나는 육체적으로, 하나는 정신적으로.

 

MP3에서 흐르는 노래는 이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이 노래를 듣는 나는 하룻밤 유할 곳 때문에 머리카락을 베베 꼬고 있다.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부딪힐 잔 하나 없는 외로운 두려움을 얼른 씻어내야 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일단 피곤함을 무기로 잠이라도 빨리 자볼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처음보단 조금 더 잘 될 것 같다는 희망이 보였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 감정은 그 결정을 따라 완벽한 반응 세리머니를 온 몸에 전파한다. 쭈뼛한 머리, 방아질하는 심장, 시멘트처럼 딱딱 굳어버린 근육과 아침햇살을 받아 커튼처럼 활짝 열리는 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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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멕시코 도로 주변 곳곳에 흉물스러운 폐가들이 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치에 홀로 건축된 집들이 궁금하기만 하다. ⓒ 문종성

▲ 폐가 멕시코 도로 주변 곳곳에 흉물스러운 폐가들이 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치에 홀로 건축된 집들이 궁금하기만 하다. ⓒ 문종성

난 이미 용감했다

 

막상 폐가에서 자려니까 이번엔 또 가끔 보였던 폐가마저 보이지 않았다. 한 동안 내 신세를 두고 그래도 남들은 겪어보지 않은 아주 기묘한 일이라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지만 곧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도로에서 3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모래 밭에서 겨우 폐가를 발견했다. 발걸음을 무겁게 끌고 갔다. 그나마 정말 눈물나도록 감사하게도 열린 건물이었다. 보통 폐가들은 천장이 뚫려 있는 건 기본 사양이고 을씨년스러운 입구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곳은 마당이 있어서 애써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마치 9회말까지 퍼펙트게임을 당하다 그래도 겨우 사구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폐가 주위에서 검은 내부를 힐끔 쳐다보자니 내가 폐쇄 공포증이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의심되었다. 여하튼 굳이 어두운 쪽으로 시선을 보내가며 공포에 질리지 않아도 되지 않아 너무 좋았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서인지 귀와 목덜미가 뜨거웠다. 큰 그림에 대한 투철한 도전정신과 용기는 가상하지만 애석하게도 본질적인 공포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취약한 내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우리 땐 산에 놀러가면 무덤에서 자곤 했지. 무덤에서 자면 말야, 혼령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거든. 그래서 '아이쿠,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면서 더 편안하게 잤어. 무덤이 얼마나 따뜻한데."

 

종종 들었던 무용담의 주인공이 이제 내가 될 차례였다.

'사내 자식이 그깟 폐가에서 하룻밤 자는 걸로 호들갑은. 당당해지자!'

 

스스로 대범하다고 마인트컨드롤을 했다. 난 이미 용감했다. 헛기침을 하며 플래시맨 속도로 텐트를 쳤다. 난 여전히 용감하다. 양치만 간단히 하고 텐트로 들어가 아침이 오기를, 해가 얼른 뜨기를,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하늘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생소한 경험을 하느라 뻐근해진 몸을 쉬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폐가에 친 텐트 위로도 여전히 무성하게 빛이 나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 너무 용감한 것 같다. 이렇게 여유있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기백이 있지 않은가? 눈을 감았다. 이제 잠을 청할 시간이다. 머리 위엔 컴퓨터 음악파일을 켜 놓았고, 허리쪽엔 손전등을 켜 놓았으며 텐트의 사방을 꼭꼭 가리웠다. 얼마나 뜨거운 기백이 느껴지는 청년의 잠자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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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막의 밤은 뭔가 다른 운치가 있다. ⓒ 문종성

▲ 그래도 사막의 밤은 뭔가 다른 운치가 있다. ⓒ 문종성

다음 날 아침, 텐트에서 나온 난 폐가와 도로를 보고 '겨우 이 정도야'라며 혀를 끌끌찼다. 가볍게 몸 한 번 풀어주고는 이 본능적 공포를 맞아 승리한 스스로에게 대견해 했다. 그 날 밤새 내내 깜짝깜짝 일곱 번은 더 깼다는 사실은 소노라 사막 하나의 모래알 같은 비밀로 던져두고서.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멕시코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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