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새벽 서울 효자동 청와대 입구에서 경찰이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며 '이명박 나와라'를 외치는 시민,학생들에게 살수차(물대포)로 물을 뿌리고 있다.
권우성
FTA 결렬보다 치명적인 사회적 신뢰상실 이명박 대통령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람 목숨은 물건 몇 개 더 팔거나 성장률 소수점 한 자리 올리는 것보다 중요하다. 게다가 국민보건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태도는 심각한 사회적 신뢰상실을 불러온다.
신뢰(trust)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집이 간밤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 없이 어떻게 잠을 청할 수 있고, 도로를 질주하는 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는다는 신뢰 없이 어떻게 출근을 할 수 있으며, 남이 만든 음식을 먹고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 없이 식당에서 밥을 넘길 수 있을까?
이런 신뢰를 가능케 해 준 것이 근대의 산물인 전문가 제도다. 현대사회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불행하게도, 한국정부는 전문가로서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것도 가장 기초적인 존재 조건인 '먹는 것'에서 말이다.
정부와 사회의 신뢰 상실은 경제로 환산될 수 없는 (하지만 결국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치명적 피해를 가져온다. 지금 한국사회를 보라. 정부에 대한 불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식당에서 고기 하나 마음 놓고 주문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게 누구 책임인가?
정부와 보수언론은 과장된 '광우병 괴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괴담론'에 대해서는 뒤에서 체계적으로 파헤치게 되겠지만, 설사 국민들이 '괴담'에 속아 법석을 떤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정부와 보수언론은 책임을 면키 어렵다. 그동안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잃었으면 그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춘 그들의 '진실'이 그토록 무참히 외면 받았을까?
유럽에서 현실이 된 광우병 '괴담' 광우병에 대한 학계와 국민들의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하는 현상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두루 찾아볼 수 있다.
광우병이 최초의 사회문제가 된 영국이 그랬고, 그 다음에는 유럽 각국의 정부가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은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그 '괴담' 비판의 대열에 가담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거부의 흐름이 광우병 확산 경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과학저널 <뉴사이언티스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북미의 광우병 위험을 예고해 '괴담 유포자'로 낙인찍힌 바 있다. 괴담이 현실화 된 후 <뉴사이언티스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영국의 광우병이 심각한 문제가 되던) 1997년, <뉴사이언티스트>는 광우병이 보이지 않는 사이에 유럽 전역에 퍼져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그 내용을 기사화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의 정부 관리들이 분노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광우병이 보고되더니, 그 다음 독일이 뒤를 이었다. 유럽 전역이 이 대열에 가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그제야 광우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강경책을 마련하고 피해규모를 파악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유럽이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보수언론이 정부를 덜 두둔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지금은 영국이 광우병 통제에 관한 모범사례처럼 인용되고 있지만,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아둔함을 만방에 과시한 후였다. 그 이후에도 영국정부는 미련한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영국 학계는 '수혈로 광우병이 오염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수혈로 광우병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로부터 어떤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못 되어 수혈로 광우병에 걸린 첫 환자가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