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 산만하지 않고 제법 단아하게 열을 지어 포즈를 취하는 쿠바 청소년들. 같은 또래 중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그래도 이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행복한 편이다.
문종성
언덕 아래 우리가 거리를 넓혀가던 지점으로 내려가 이 사람 저 사람 다 붙잡고 준호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스무살이긴 했지만 해외여행은 더구나 자전거 여행은 처음인 녀석이었기에 내 마음은 자식 잃어버린 부모 못지않게 타들어갔다. 그러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돈 많은 한국인인 걸 알고 납치? 그럴 리 없어. 아님 사고? 설마…. 목격자가 없는데. 그러니까 아침에 우스갯소리로 넘긴 오늘이 6월 13일, 금요일. 설마 13일의…금요일? 이런 말도 안 되는….'실종이란 말이 이렇게 피부로 가깝게 다가와 본 적이 없었다. 전신에 밀려오는 극도의 피로감. 20여 분이 흐르도록 난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준호의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렇게 햇살이 서편 하늘에 거의 다 꺾일 때쯤이었을까.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나를 부르는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익숙한 파동이 진동하고 시선을 돌려보니 이런 확!. 저녁 어스름이 내리 깔린 도로 위에 언뜻 비친 '저팔계'의 형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걱정이 되어서 화가 나기보단 감사했다.
아쭈, 실실 쪼개? 근데 웃음이 나오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형,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준호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사라진 연유에 대해 조근조근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태세였지만 일단 숙소 잡는 게 급선무였다.
아무튼 만나기야 한 까닭에 허탈하게 웃자니 준호도 겸연쩍었던지 따라 웃는다. 땀과 먼지로 얼룩져진 준호 눈가에 유독 선명한 줄기 하나를 보자니 고생도 참 고생이다 싶다. 우리는 추스를 겨를도 없이 숙소를 찾아 시세보다 33%(아바나를 제외하고 쿠바 전역에서 우린 2인 15CUC를 지불했다. 이 곳만 20CUC)나 비싼 가격을 부르는 주인의 어설픈 연기를 모른 척 눈 감아주고는 방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저녁식사를 위해 준호를 두고 혼자 쇼핑을 했다. 준호는 배가 고픈 상태에서도 이 여행의 눈에 보이는 효과인 '다이어트'라는 당면과제가 있었으므로 밥을 참고 음료수만 마시기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도 음식을 먹는 건 어쩐지 동업자 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아 같이 음료수로 허기를 때웠다.
중노동을 방불케 한 라이딩을 하고 나서 먹는 같잖은 저녁 식사였지만 너무 지쳐서 그랬던 걸까. 서로가 배고프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준호는 살이 찐다며 극구 먹지 않겠다던 내게로 밀어낸 아이스크림을 다시 제 쪽으로 슬쩍 잡아당겨 몇 숟가락 떠먹는다. 그리고 나서 수저를 잠시 내려놓고 오늘 이러난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그의 얘기인 즉, 내가 먼저 언덕을 앞서 나갈 때였다. 이미 죽을 만큼 달려왔는데 마지막 언덕을 보고 있자니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처럼 그만 숨이 턱 막혀오더라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쳤고, 물은 다 마셔버려 목은 타고…. 이대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판단, '에라, 모르겠다' 다 포기하고 길 옆 버스정류장으로 들어갔단다. 그래놓고 보니 자신의 처지가 마냥 서글퍼 급기야 펑펑 울어버렸다고.
녀석은 얼마나 서러웠는지 울다 지쳐 이젠 아예 자전거도 뉘어버리고 대자로 누워 자버렸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자기를 찾고있는 내가 걱정이 되어 '아차' 싶어 현지인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급하게 자기를 찾는 형이 혼비백산해 아까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단다.
결국 준호는 길 옆 버스 정류장에서 나무에 가려진 채로 세상모르게 잠을 잤으니 내 시선에 띄지 않았던 거고, 뒤에 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참 팔자 좋은 소리였다.
샤워를 하고 가뿐한 몸이 된 준호는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경직된 안면 근육을 풀어 웃음꽃을 피워냈다. 솔직히 초행길이라는 이유로 적잖이 사람 힘들게 하고 때론 놀래켜 놓고도 실실 쪼개는 밉상이란, '아휴~'.
그런데 나도 따라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다시 찾은 내 양심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녀석을 잃어버림으로써 다시 한 번 내 책임과 역할에 대한 의식을 선명히 각인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 또 이러면 아주 그냥 혼내줄테닷!'
준호에게는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다. 다시 지도를 보고 루트 및 일정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아직 남은 일정이 많은 만큼 이제부턴 철저히 우리가 아닌 준호 중심으로 계획을 짜기로 합의했다. 근데 이 녀석, 가만 보면 자존심 세면서도 은근히 잘 운다. 다음엔 또 무슨 일로 울게 될까? 녀석의 눈물이 마음의 키를 자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