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곽진성
지난 16일 방문한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중국어 간판이 달린 맥줏집과 순댓집이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왕만두집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흐릿했지만 거리에선 총총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재중 동포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말과 중국어를 섞어 말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정겨우면서도 또 한편으로 낯설었다.
일자로 형성된 길을 따라 쭉 들어가 보니 중국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노래방이 여러 개 있었다. 중국 전통 식재료를 파는 곳도 눈에 띄었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한족 등의 중국계 사람들도 종종 보였지만 대다수가 우리말을 쓰는 재중 동포였다.
가리봉동에 이렇게 많은 재중 동포들이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으며 길을 걷다 73년에 가리봉동으로 이사왔다는 안정묘(66)씨를 만났다. 안씨는 이곳에 재중 동포들이 많아지게 된 이유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중국과 수교가 된 다음, 한국을 찾아오는 재중 동포들이 생겨났고 그 후 숫자는 점차 늘어났다. 구로공단에서 일하기 위해 건너온 그들은 잠잘 곳을 찾다가 가리봉동의 싼 쪽방을 찾아들어 왔다. 그렇게 점차 늘어나 가리봉동은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이 되었다. 지금 가리봉동에는 집주인들을 제외한 세입자들 태반이 재중 동포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가리봉동에는 얼마나 많은 재중 동포가 살고 있을까? 구로구청 민원 여권과에 문의한 결과 현재 가리봉동에 살고 있는 중국 동포수(신고자)는 7175명(한족 248명 미포함. 11월말 기준)이었다. 이는 가리봉동 주민 인구 1만5731명의(중국 동포 미포함)의 46% 에 달했다. 단순히 보면 가리봉동 사람 절반 가량이 재중 동포라는 것이다.
가리봉동에 살고 있는 재중 동포의 비율은 구로구 전체에 살고 있는 재중 동포(2만5311명) 의 35%에 달했다. 미신고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1만여명 넘는 재중 동포가 가리봉동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가리봉동은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려 보였다.
가리봉동은 고향을 떠나온 재중 동포들에게는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다. 황연실(54·재중 동포)씨는 이곳이 고향 같다고 했다. 황씨는 올해 초 5년 기한의 방문 취업 비자(H-2)로 입국했지만 한국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재중 동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견뎌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황씨에게 있어 재중 동포 밀집지역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이웃들이 있는 소중한 장소다.
"한국에서는 재중 동포들이 옷 하나 물건 하나 고르기 쉽지 않다. 한국에서 옷가게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면 재수없다 꺼져라 소리를 듣는다. 서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가리봉 종합시장에 가면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준다. 이곳이 있어서 그나마 재중 동포들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