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내 인생의 이모작

50대 후반의 아줌마 시민기자, 지역신문 기자되다

등록 2009.02.18 11:53수정 2009.02.19 15:1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지역신문 시민기자 위촉장 .. ⓒ 정현순

▲ 지역신문 시민기자 위촉장 .. ⓒ 정현순

 

지난 16일,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그동안 푸근했던 날씨가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찾아왔다. 그래서인가  몹시 쌀쌀함을 느끼게 하는  날씨가 오히려 상큼하게 느껴진다. 교정을 보기 위해서 부지런히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각자 배당된 기사의 교정을 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편집장의 말이 들려온다.

 

"교정 볼 거 아직 더 남았어요?"

"아니요. 다 된 것 같아요."

"그럼 이대로 인쇄에 들어가도 되겠지요."

"네~~."

 

10명의 시민기자들이 모두 교정을 마쳤다. 내가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되고 그렇게 두 꼭지의 첫 기사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오마이뉴스 때문에 난 지역신문 시민기자의 명함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2002년 12월, 50대에 막 접어든 나는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지도 않던 변화가 정말 많이 찾아왔다. 그렇게 많은 변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내 인생에 이런 날도 다 찾아오다니!  할 정도로 믿기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첫 기사(손자 돌보기 두 달 만에 그만둔 사연)가 메인톱에 오르면서 방송국과 여러 군데의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잡지사의 연재, 아침마당, 주부세상을 말하자, EBS방송국 등의 패널로도 오랫동안 출연을 했다.

 

그런가 하며 오마이뉴스에 두 번째로 올린기사 피아노 치는 할머니를 시작으로, 2009년 2월 초순에는 KBS 1방송국에서 방영되는 TV행복한세상에 5번째 작품(친절한 집배원 아저씨)을 계약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소하게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변화 중에 요즘 나를 들뜨고 흥분시키고 있는 것은 시흥시 지역신문의 시민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인생의 이모작, 또 다른 시작의 출발점에 서있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세상이 온통 내것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2004년, 지역신문의 시민기자를 꿈꾸다

 

2004년 그곳의 기자들이 오마이뉴스에 올린 '손자돌보기 두 달 만에 그만둔 사연'을 보고 나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오마이뉴스란 인터넷매체에 글을 쓰게 되었냐면서 무척 신기해 했다. 난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틀에 걸쳐 취재를 했다. 그전까지는 그런 지역신문이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

 

나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 집으로 배달이 되었다. 한 면 전부에 내 기사가 실렸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 기사를  보고 축하의 인사도 많이 전해주었다. 그때 그들이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나도 저런 지역신문에 기자가 되고 싶다'라는  희망을 막연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역신문에 기자가 된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만의 점유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에게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에 글을 계속 올리다보니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역신문 기자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기 시작했다. 

 

2007년, 용기내어 지역신문 시민기자에 도전하다

 

그러던 중 2007년 겨울, 시민기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그곳에 전화를 했다. "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었는데 시민기자에 응모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었다. 담당자는 "이력서 한번 내 보세요"한다. 하여 정성스럽게 폴더를 만들어 이력서를 제출하고 기다렸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었다.

 

그곳에 도전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나이가 많은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꼭 올 것만 같았다.  2008년 1월 어느 날,  답변이 실린 전화가 왔다. "저 이번에는 안 되겠고요. 제가 서류를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연락을 드릴게요"하는 내용이었다. 난 '그렇구나.역시 난 나이가 많아서 안 되는 거야'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그 일에 아쉬움을 남겼다. '말이 그렇지 나중에 무슨 연락을 줄까?'하면서. 그 지역 신문을 볼 때마다 작은 미련이 쏫구치는 마음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늘 갈증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곳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2008년 11월말쯤 "내년에 시민기자 하실 의양이 아직도 있으세요?" 정말이지 너무나 좋았다. "그럼요. 그럼 저는 너무 좋지요.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불이익 같은 것은 없나요?" "그런 거 없습니다"한다. 그럼 그때는 왜 그랬을까?

 

50대 후반의 시민기자, 드디어 지역신문의 시민기자 되다

 

그렇게 해서 올 2월1일자로 시민기자의 위촉장과 명함도 받았다. 위촉장을 받고 며칠 후 첫 편집회의를 했고, 사진기자와 함께 첫 취재를 나가게 되었다. 만약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지 않았다면 취재를 어떻게 하는지.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취재갈 곳의 섭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잘 끝내고 드디어 첫 취재도 비교적  잘 마칠 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기사 첫마디는 어떻게 시작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따끈따끈 할 때 기사작성을 하고 송고를 마쳤다. 과연 내가 보낸 첫 기사는 합격일까? 아님 어디가 부족할까? 약간의 긴장된 마음으로 그곳의 반응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여 교정이 있는 16일 조금 일찍 가서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사 그렇게 쓰면 괜찮아요?" "네 좋아요"한다. '휴~~ 안심이다' 날아 갈 것처럼 좋았다. 그렇게 몇 군데의 교정을 본 후 인쇄에 넘기게 되었고 2월 말경 종이신문이 나오게 되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 아래에 '취재기자: 정현순'이란 내 이름 석 자가 나올 것을 생각하니 지금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앞으로 지역신문의 시민기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의 역할을 늘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로 임할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나에게 어쩌면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파묻힐 일들에게 생명을 주어 세상에 밝은 빛을 보게 해주었다. 

 

2009년 2월 초순경에는 오마이뉴스의 잉걸1000꼭지로 1차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다. 다음목표를 위해서는 한발자국 더 높이 뛰어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이, 읽고, 쓰고, 배우고, 경험, 해야 할 것이다.  

 

친정엄마와 같은  오마이뉴스는 내 인생의 밝은 등대이며, 내 인생의 꽃피는 봄날과 같은 존재이다. 오마이뉴스가 있는 한, 나의 새로운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내 인생의 이모작의 시작이니깐!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때문에 생긴일

2009.02.18 11:53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때문에 생긴일
#오마이뉴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주로 사는이야기를 씁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4. 4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5. 5 스타벅스에 텀블러 세척기? 이게 급한 게 아닙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