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수목드라마 <카인과 아벨>에서 최치수 역을 맡은 백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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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은 요즘 흔치 않은 공채 출신이다. SBS <화려한 시절>에서 류승범의 고등학교 친구로 나온 이후 꾸준히 브라운관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화려할 것만 같은 연예계에서 근 10년을, 연기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생활인의 자세로 견지해 왔다.
그러나 배역이 작았다고 연기에 대한 열정이나 포부까지 작았던 것은 아니다. 백승현은 스무살 무렵 브로드웨이 무대를 직접 알현한 뒤, 연기에 대한 너른 꿈을 안고 뒤늦게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시종일관 겸손함을 보이던 그도 그 열정이 넘쳤던 학창시절 얘기엔 호흡이 가빠지고 말이 빨라졌다.
- 원래 부산 출신이죠? 연기자의 꿈은 언제부터 꾼 건가요? "진짜 스탠다드 한 삶을 살았다고 해야 되나? 모범생조차도 안 될 정도로 평범했어요. 그리고 저보다 잘 생긴 애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튀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끼도 좀 있으니까 연기에 대한 욕망도 있었던 거죠. 몸도 안 좋고, 잡기도 없는 터라 어렸을 때부터 영화보고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 어학연수를 보스턴으로 가게 됐으니 얼마나 자유로웠겠어요. 그래서 가까운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서 <미스 사이공>도 보고 연극도 보고 그랬죠. 그때는 철이 없었어요. 별로 대단한 사람이 못될 거라면 이왕 힘든 거,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막연한 꿈이 있었죠. 좀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싶고. 이렇게 살 줄 몰랐으니까.(웃음)"
- 그 후에 연극영화과에 다시 진학을 한 거죠? "한국 돌아와서 다시 시험을 봤죠. 학교를 다니면서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가 재미있고 나한테 맞고. 보통 한 한기당 한 과목만 연기를 해도 다른 수업을 빠질 정도로 연습을 해야 되는데, 전 세 개씩 하고 그랬어요. 미친 듯이 한 거죠. 지금 하라면 아마 못할 거예요.(웃음)"
- 공채는 어떻게 응시한 건가요? "사실 제가 텔레비전 나오는 것도 신기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올 인물이 아니거든요.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있잖아요. 잘생기고 멋있거나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해야 된다거나. 그러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되는데 저는 그냥 평범하니까 먹고 살길이 막막하잖아요. 졸업은 다가오는데 계속 학교에서 연극만 했지. 그래서 공식적으로 열려 있는 채널이 공채라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붙은 거죠."
- 연극영화과도 똑같이 취업난에 시달리나 봐요. "취업난은 똑같아요. 그때 트레이닝 삼아 성우 시험도 보고 그랬어요. 준비를 많이 안 했으니 다 떨어지긴 했지만. 돌아보면 제가 고맙죠. 제가 공채를 통해 대스타가 되진 않았지만 공채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었겠어요?"
"일 없으면 슬럼프... 슬럼프 메우는 것이 단편영화"- 출연작들을 돌아 보면, 공채 출신 연기자의 단면이 엿보여요. "노는 선배들은 '너는 공채 치고 그래도 계속 일을 하지 않느냐'고도 해요. 그래도 갈증은 있죠. 연기를 하다 문득 재미가 없기도 하고.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입사했는데 만날 두 줄 세 줄, 한 신 두 신 그랬거든요. 열정을 가지고 나름 공부하고 연구를 해서 가면, 주인공이 묻히니까 그러지 말라고 해요. 서럽죠 뭐. 작품 전체를 봐서는 그게 맞아요. 그래도 내 딴에는 뭔가 해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인 거죠. 이번에 중국 가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양이 적어도 연기할 맛이 난다랄까. 꺼져가던 연기에 대한 애정이 더 살아나는 느낌이었어요. 그게 가장 반갑고 그 점이 최치수를 통해 제일 크게 얻은 선물이에요."
- 당연히 슬럼프도 있었겠어요. "작년만 해도 뜸했어요. 4편을 했는데 모두 단역이었죠. 이제 감독들도 '남자1' 이런 역할은 안 줘요. 작은 역이라도 고정이면 모르는데 며칠하고 끝나버리니 답답했죠. 일 없으면 항상 슬럼프예요. 일 하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어요. 그런데 놀게 되면 마음만 허해지고 불안해지죠. 그 슬럼프를 메우는 것이 단편영화예요. 돈 한 푼 못 받아도 학생들이 가진 재기 발랄함이나 신선함이 좋거든요. 저도 그런 열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배우들의 딜레마가 어떤 매너리즘이잖아요. "배우는 어떤 한 장르에서 인정을 받아도 참 애매한 거 같아요. 오래 연기를 하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또 매너리즘을 극복해야 되니까. 또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살면서 연기 자체만 고민하고, 역할만 연구하면 참 행복한 삶일 거라고 생각해요. 막연하게 시작한 배우 짓이지만 외적인 고민들이 더 크니까요."
- 이제 와서 뭐하겠냐는 생각도 들겠어요.(웃음)"전업할 능력은 못되고요. 그럴 거면 일찌감치 다른 거 했죠. 그건 건방진 생각이에요. 이제 10년을 해서 조금 돌아가는 상황을 볼 줄 아는 눈치가 생긴 정도 거든요. 그게 노하우인건데 다른 일 10년 하신 분들은 어떻겠어요. 건방지게 덤볐다가는 망하기 쉽죠."
생활 속에서 연기를 준비하는 남자, 백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