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표 노무현'이냐 '노무현표 노무현'이냐

[노무현과 나눈 대화를 다시 들추다 ③] 2000년 12월 12일

등록 2009.05.31 10:29수정 2009.05.3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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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곳은 '차원'이 좀 달랐다. 그동안에는 변호사 사무실과 선거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번듯한 장관 집무실이다.

그의 때깔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는 아주 단정했고, 윤기가 흐르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잘 웃었고, 표정에는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2000년 12월 12일 오전 10시.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 신사옥 11층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지난 1월 10일 부산에서 만난 지 11개월 만이다.

왜 '끗발 없다'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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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 장관이던 그는 잘 웃었고,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 월간 <말>

'노무현 장관'은 같은 해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됐다. 부산은 그를 내리 세 번이나 외면했지만, DJ는 정권교체의 공신이자 지역주의 극복의 전도사였던 그를 부활시켰다. 일각에서는 그가 행정자치부장관이나 노동부장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그런데 왜 '끗발 없다'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된 것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고려가 숨어 있었다. '차세대 주자 복수화 전략'도 작동했고,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영남지역의 민심을 달랠 필요도 있었다는 것.

"대통령의 뜻을 직접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저도 그렇게 해석하지요. 사실 해양수산부 민원의 대부분이 부산·경남쪽에 몰려 있거든요. 내가 나서서 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민심을 풀어가는 데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저야 또 영남쪽에 기반이 필요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노 장관의 최대 장점은 '솔직함'이었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눈치를 봐가며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인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의 국정위기 진단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김심'을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대목이다.

"정부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그건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정권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실보다 더 증폭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얘기한 겁니다. 사실 너무 크게 증폭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대단히 분개하고 흥분하고 있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일들입니다. 세상이 바뀌니까 기대치도 높아지고 그 기대치에 비하면 그것들이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느껴지겠지만 지금의 민심이반은 지나치게 증폭되어 있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너무 안일한 정세판단 아니냐?"고 따져물었다. 그러자 비유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 특유의 방법으로 그는 답변해 나갔다.  

"정치지도자나 정권은 '맞춤'이 아니라 '기성복'이에요. 국민들은 '맞춤'을 요구하겠지만 존재하는 정치세력(정치권력)은 특히 정치지도자의 경우에 '맞춤'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선거 때 '기성품' 중에 하나를 고른 겁니다. 김대중 시대는 김대중 시대로서 명과 암이 있어요. 과거 5, 6공이 존재할 이유가 없이 존재했던 것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분명히 김대중 정권은 존재할 이유가 있고, 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어요."

노 장관의 때깔이 달라진 만큼 비판의 칼날도 무뎌진 듯했다. 그런 질문에 노 장관은 좀 억울해 하면서 이렇게 자신을 방어했다.

"위치에 따라 역할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진의 지위에 있으면 (일반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라 책임 있고 대안이 있는 문제제기를 해야죠. 제 말이 가지는 비판의 칼날은 무뎌졌을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책임감과 도전정신은 절대 무뎌지지 않았어요."

"이 다음 상황은 '노무현표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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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지 4개월 만에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부활했다. ⓒ 월간 <말>

당시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차기 대통령은 영호남 모두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영남후보론'을 내세웠다. 영남 출신인 김중권·정몽준·박근혜 등이 물망에 올랐다. 노 장관도 거기에 포함됐지만, 그는 허주(김윤환 대표)의 영남후보론에는 각을 세웠다.

"단순히 집권전략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과 지금까지 동서통합을 위해 살아왔느냐 하는 점에서는 다르지요. 누가 갑자기 무슨 깃발을 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동서통합이 (다음 대선의) 주제가 된다면 동서통합을 위해서 얼마만큼 헌신했는가 하는 진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거죠. 필요에 따라 자리를 바꾸고 논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신념과 철학으로 밀고 나가야죠. 한마디로 '논리'는 같지만 '철학'은 달라요."

한마디로 "차기 대통령은 동서통합의 지조를 지켜온 사람이 적임자"라는 얘기다. 이어 내가 물었다. "장관님은 지난 총선에서 '호남표 노무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진 것 아닙니까? 그 이미지를 어떻게 바꿔 나갈 생각입니까?"라고. 그러자 이런 의미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제가 뭐라고 하든 저는 현재 '김대중표 노무현'이지 않습니까. 역학적으로 그렇게 구성돼 있어요. 아무리 제 소신으로 이 길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지금 영남사람들에게는 그저 '김대중표 노무현'입니다. 그런데 이 다음의 상황은 '노무현표 노무현'입니다. 그 상황에 기대를 걸고 있죠."

그런데 노 장관이 '노무현표 노무현'이라는 표현이 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DJ와는 다른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발언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기자의 말을 가로채며 "이 얘기는 좀 해놓는 게 좋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자신과의 차별화를 위해 과거 지도자들을 전면 부정해왔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회창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무현표 노무현'이라는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저를 차별화하는 전략은 절대 쓰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20년 이후 한국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김 대통령의 업적을 살려 나가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차기 대선구도는 '이회창-이인제' 2강구도였다. 그런데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바보 노무현' 신드롬이 일어나고,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되자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0월 중순 한길리서치의 차기 대선주자 가상대결에서 노 장관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를 8.5%P 차이로 앞섰고, <한겨레21>의 호감도 조사에서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양강구도에 큰 균열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제가 '선수'인 줄을 몰라요. 아직 출전을 안 한 상태라 '출전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나 출전하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지난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때도 출전하기 전에는 별도 뜨지 않더니 출전한다니까 팍 뜨던데요. (웃음) 그래서 호감도가 중요해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 장관은 예전보다 훨씬 잘 웃었다. 그 웃음은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장관직 수행은 물론이고 차기 대권을 향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잘될 것만 같은 생각이 안 들어요? 저하고 얘기하고 나면 세상이 나아질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노 장관은 2년 뒤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5년의 임기도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그가 내게 약속한 것처럼 세상은 나아졌을까? 그가 임기 후반기에 강력하게 추진했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이 곧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은 무거워진다. 한미FTA는 역사적 평가가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그의 영면을 빈다.

[인터뷰 어록] "김근태 의원은 아주 훌륭한 지도자감이다"

"김대중 정부도 한계는 있어요. 한계는 한계대로 인정하되 잘하는 일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느냐, 아니면 그 한계를 가지고 김대중 정부를 흔들어서 역사적인 역할마저 못하게 할 거냐 하는 것은 국민들의 선택이죠. 이 시점에서 우리 국민들이 선택할 것은 결국 '기성품'이라는 겁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지나쳐서 민심을 선동하고 모든 국민의 희망조차 상실하게 해서 잘하는 일도 제대로 못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 저는 김대중 정부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언론을 매우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민심조차 동교동계를 겨냥하고 있지만 민심 이반이 동교동계의 존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아요. 동교동계가 2선으로 퇴진한다고 현재의 위기적 상황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중권 비서실장 체제 때 동교동계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동계동계는 당시 숨을 죽이며 엎드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이미 민심이 이반될 만한 사건들이 줄줄이 터졌잖아요."

"우리에게는 후계자가 정해지면 레임덕이 생긴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당대당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없을 때 가능한 얘기지요. 지금의 상황은 당대당 정권교체가 언제든지 가능한 상황이에요. …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당내 차기주자들을 띄워서 당대당 권력이동의 가능성을 줄이자는 거지요. …지금 상황에서 우리 당이나 대통령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대당 권력이동의 가능성이에요. 그래서 '당내의 차기주자를 편중되지 않게 복수화하라'고 한 거죠. 하나보다 두 개가 안전하니까요. 비행기도 예비예진을 달고 다니잖아요."

"김근태 의원은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죠.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깊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있구요. 아주 훌륭한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자질은 대중적 인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치인이 성공하는 데 필수조건인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은 점이 아쉬워요."

#노무현 서거 #해양수산부 장관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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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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