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서야 비로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이유

그 아름다운 바보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9.05.30 12:16수정 2009.05.3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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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

 

오늘에서야 비로소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7일만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당신의 죽음 앞에 늘어선 저 끝없는 조문 행렬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 국민의 가슴 속에 당신의 존재가 그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당신은 한때 두 자리수 지지율을 가까스로 지켜야 할 만큼 위태로운 시기를 겪었던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었던가요. 돈 문제로 숱한 구설수에 올랐던 부자 대통령 후보에게 국민들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표를 몰아주었던 것이 곧 당신의 실패를 반증하는 것이라면 지나친 평가일까요.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하죠.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됐을 무렵 당신은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거대 야당의 거센 요구에 밀려 대북송금 특검법을 받아들인 것이 하나이고, 미국의 그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그 두 가지 결정을 접하며 당신을 아꼈던 많은 이들은 커다란 좌절감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실망감이 아닌 좌절감과 배신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두 사건을 겪으며 당신을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당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뒤로도 당신의 행보는 위태로웠습니다. 다시 몇 달 뒤에는 철도노조의 파업 현장에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힘으로 제압한 일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런 모습은 마치 노동인권 변호사로서의 오래된 기억마저 지워버리려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에 어느 노동자는 커다란 크레인 꼭대기에서 129일 간 농성을 벌이다 주검이 되어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또 어느 농민은 한 겨울 살을 에는 추위 속 농민대회 도중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아스팔트 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더 있습니다. 당신이 대단한 의욕을 보인 한미FTA의 체결을 앞둔 순간 그 협정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던 어느 순박한 택시 운전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들까지를 포함해 당신이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로 있던 5년간 비슷한 이유로 죽음에 몰린 이들이 자그마치 23명이라고 합니다(한국인권뉴스, 2009. 5. 25). 이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또 이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라면 아마도 당신과 함께 했던 5년의 세월을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일주일간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요.

 

어떤 이는 무리한 검찰 수사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한 당신에 대한 '연민'을 이유로 꼽습니다. 또 어떤 이는 대다수 국민의 처지를 외면한 채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현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당신의 친근한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이유로 꼽는 이들도 있습니다.

 

수백만 명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단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 가장 많은 눈물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있을 겁니다. 당신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 이유를 '후회'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대통령이던 시절 당신을 조금 더 믿고 지켜봐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부자 대통령을 선택했던 후회, 그리고 검찰과 언론에 둘러싸여 뭇매를 맞던 당신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돼주지 못한 후회...

 

지난 며칠 사이 언론매체들이 경쟁하듯 쏟아낸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느 바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부림사건 피의자의 몸에 가득한 고문의 흔적들을 보며 노동인권 변호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 그 바보는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는 등 험난한 길을 걷게 됩니다.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이 된 바보는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증언대에 선 전두환에게 자신의 명패를 집어던져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정치입문을 이끌었던 김영삼이 민정/공화당과의 야합을 선언하자 결별을 선언한 뒤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서겠다며 당의 지역 기반을 포기하고 적진인 부산으로 달려가 세 번의 선거에서 뼈아픈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포기하기는커녕 더 높은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역동적인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바보는 물론 당신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당신이 대통령이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이 바보로 남아있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무모한 도전으로 손해만 보는 바보는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의 실패와 정부의 정책 실패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끈 참여정부 5년의 기억 속에서 '참여'의 경험을 찾아내는 일보다 '무능'과 '아마추어리즘'을 떠올리는 일이 훨씬 쉬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민들은 오랜 세월 바보의 꿈을 응원해주었고 마침내 바보가 꿈을 이룬 날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며 기뻐해주었지만, 꼭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내 삶과 맞닿은 냉혹한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정책 실패의 원인을 찾는 작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당신의 정책이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분명한 사실과 더불어, 때로 불가피한 선택의 기로에서 내린 결정에 대해 당신이 국민에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거나 또는 겸허하게 국민 속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설사 그 선택이 당신이 지금까지 추구했던 가치와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해도 국민들은 조금 더 큰 믿음으로 인내하며 지켜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당신은 30점이 채 안 되는 마지막 성적표를 손에 쥐고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고 국민의 기억 속에서 당신은 조금씩 잊혀져갔습니다. 그나마 '아름다운 바보'가 아닌 '실패한 대통령'으로서 말입니다.

 

가끔 언론을 통해 당신의 시골 생활들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이웃 주민들과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나눠 마시든, 허름한 구멍가게에 앉아 폼 나게 담배를 피워 물든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바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고향으로 돌아간 퇴임 대통령일 뿐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비로소 당신은 대통령이 아닌 바보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한때 많은 국민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바보,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스스로 모든 권위를 거부했던 바보, 국민의 아픔을 진심어린 눈물로 보듬었던 그 바보로 말입니다.

 

더불어 당신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와 언제부턴가 우리네 삶을 옥죄고 있는 그림자가 실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무언가가 언젠가 우리들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제와 얘기하지만 '바보의 꿈'이 있어 한때나마 행복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영영 잊혀졌을지 모를 그 소중한 꿈과 가치가 오늘 당신의 영정 아래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국 민주주의의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근거입니다.

 

"패배를 받아들여야 민주주의가 이뤄진다.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는 않으며 굽이치고 좌우 물길을 바꿔가는 게 세상 이치지만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고별 만찬에서

 

고백하건데 한평생을 바보로 살았던 당신을 끝까지 믿어주지 못했던 것이 사무치게 후회돼 오늘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한참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같은 시간 어디에서건 저와 같은 이유로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며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모든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와 편견, 기득권과 차별을 넘어 다시금 한국 민주주의의 강물이 우리 사회에 굽이쳐 흐르게 할 것입니다. 당신을 대신할 '아름다운 바보'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끝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모두 잊고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고향 봉하에서 맛보았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같은 추억만을 간직한 채 부디 편히 잠드시길 빕니다.

2009.05.30 12:16 ⓒ 2009 OhmyNews
#노무현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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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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