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49재가 끝났다. 이제 그는 우리들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의 역사적 기준이 되었다.
지켜주지 못한 광해군
저번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우리 학교에는 공익 요원이 한 명 있었다. 똑똑하고 건실한, 참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나와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소리를 했다. "광해군은 폭군 아니었어요?"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너 국사 시간에 잠만 잤지!!!"
그 청년이 지겨워해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 청년은 고등학교 시절 국사 시간에 열심히 듣지 않은 것을 반성하고, 광해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수긍한 후에야 내게서 풀려났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은 알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당시에는 명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기에,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인들에게 크게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다르게 평가받는다는 것을. 두 강대국 사이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서 명에게도 청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우리의 실리는 챙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것을.
국사 교과서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대해서 성실하게 잘 서술하고 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반정으로 등장한 서인정권이 청과의 전쟁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친명반청'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초래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주고 있다. 중립외교를 비판하며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정권으로서는 청의 침략을 받더라도, 나라가 망하더라도, 친명반청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들의 반정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광해군 그리고 노무현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던 날, 나는 분노에 휩싸인 채 미친 듯이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뉴스 사이트, 동호회 사이트, 친구들과의 친목 사이트 등등… 내가 방문한 많은 사이트에서 공통적으로 본 이름은 '광해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건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었다. 아마도 국사 시간에 광해군의 중립 외교, 인조반정, 병자호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배우면서 국사 선생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을 만들지 말자고.
학생 시절, 국사 시간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꺾이고, 대책없는 사대주의의 결정판 '친명반청' 외교가 초래한 병자호란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울분을 느끼며 결심했을 것이다. 만약 광해군이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지켜주자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과 국민들의 촛불 시위를 보면서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뿌듯했다. 우리나라 국사 교사들은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쳤구나. 그래서 성인으로 자라난 학생들이 배운 대로 광해군을 지켜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국사 시간에 졸지 않고 바르게 수업을 들었던 수많은 국민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돌아온 광해군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주었다. 그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헌재에서 기각되었고,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가진 다수당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한 번만 지켜주고 끝내기에는 현대의 서인정권은 너무나 강했다.
미래의 노무현을 지켜주어야 한다
결코 바라지 않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함께, 또 한 명의 광해군을 만들고야 말았다.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또 하나의 역사적 기준이 되었다. 그는 국사 교과서에 서민을 위했던 대통령, 기득권과 지역감정 타파에 온 몸을 던졌던 대통령, 그래서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줘야 할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의 후손은 다음에 돌아올 노무현 대통령은 지켜줄 것이다. 광해군 이야기와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 둘 다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이나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배우고 반드시 지켜주리라 결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오래오래 살아있을 줄 알았다. 봉하마을에 북적대며 몰려드는 관광객의 수가 조금 줄어들면 언젠가 찾아가서 실제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지금처럼 현실에 패배하고, 역사에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대통령이 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퇴임 대통령으로서 천수를 누리시고 가시기를 바랐었다.
그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우리에게 남긴 채 역사에 승리한 대통령으로 현실세계를 떠나갔다. 하지만, 대성통곡으로도 이 애통한 마음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이미 그가 절망 속에 생을 마감했는데, 역사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역사에 길이 남은들, 역사에서 이긴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떠나간 그를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길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그를 바르게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동량이 될 나의 제자들이 미래의 또 다른 노무현은 바르게 지켜내도록 인도하는 것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게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광해군을 내쫓았던 어리석은 조선의 백성은, 광해군을 떠올리며 노무현을 한 번은 지켜준 조금 성숙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미래의 우리 후손들은 분명 다시 돌아올 노무현을 두 번 세 번이라도 지켜줄 수 있는 바르고 현명한 대중이 되기를 기대한다. 만약 그러지 못 한다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존재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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