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엽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장.
오마이뉴스 구영식
DJ가 서거한 지 이틀째인 19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사무실에 만난 최규엽 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86년에 수배됐는데 87년 잡혀서 감옥에 갔다. 당시는 6월항쟁이 끝나고 (양김이) 후보단일화한다고 할 때다. 나는 후보단일화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후보단일화가 안되면서 표를 한군데 몰아줘야 했다. 그때만 해도 교도소 안이 자유로워서 면회를 1시간 가까이 허용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DJ지지 선언문을 불러줬다. 그걸 아내가 받아적어 유인물로 만들어 뿌렸다. 아내가 중원문화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황세연 사장도 DJ지지자였다."6월항쟁 당시 각 운동권그룹은 ▲ 제헌의회 ▲ 삼민헌법 ▲ 헌법제정민중회의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최 소장은 '직선제 챙취'가 가장 현실적인 행동구호라고 생각했다.
"일부 그룹들은 독자후보로 백기완 후보를 냈는데 난 이들이 상당히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헌의회니 삼민헌법이니 혁명적 슬로건을 주장했으면 직선제를 부인했어야 했다. 선거를 보이콧하고 혁명하자고 해야 일관성이 있는 것 아닌가." 최 소장과 DJ의 인연은 DJ가 처음으로 대권에 도전한 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주고 1학년이었던 그는 학교운동장에서 열린 DJ 유세를 보러 갔다. 선생님들은 "절대 보러 가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의 호기심은 꺾을 수 없었다.
"DJ가 연설하는데 예비군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예비군를 폐지하겠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상당히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87년 옥중에서 DJ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최 소장은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반대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는 "DJ가 얘기한 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총통제를 하려고 한 것"이라며 "고 3학년의 눈으로 봐도 그건 쿠데타였다"고 술회했다.
DJ와의 인연은 87년 'DJ 지지 옥중서신'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명 '남노련 사건'(정확하게는 '민중사상연구회사건')으로 복역한 뒤 89년 출소하자 DJ쪽에서 S씨를 보내 '노동담당 특보'를 제안해왔다. 당시 S씨가 "면밀하게 검토해서 결정한 거니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최 소장은 이렇게 그의 제안을 일축했다.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냐? 난 노선이 달라." "정계복귀 이후 DJ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돼 있었다"87년 대선에서 DJ를 지지했던 최 소장은 92년 대선 때는 '민주정부수립론'에 섰다. '독자후보를 선출하더라도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야당후보와 민주연합을 하자'는 주장이다.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을 독자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접촉했지만,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DJ쪽과 정책연합을 진행했다.
"전국연합이 DJ선본과 정책연합을 했는데 국가보안법 폐지 등 양쪽에서 합의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런데 DJ쪽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감표 요인이 된 것으로 평가했다. 정책연합의 내용이 너무 셌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DJ가 운동권과 거리를 뒀다. 그때 DJ가 대통령이 됐으면 많이 달라졌겠지만, 낙선하면서 그 이후 급격하게 보수화됐다."당시 서울노동운동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최 소장에게 '웃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노조간부 교육자료집에 짧게 들어간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후보를 밀어야 한다'는 대목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혐의를 받아 수배를 당한 것이다.
DJ는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뒤 97년 '대권 4수'에 도전했다. 앞서 최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그는 당선을 위해 '뉴DJ플랜'이라는 보수화 전략을 구사했다. DJP연합은 그 최종판이었다.
최 소장은 "진보진영이나 운동권과 연합하려다가 안되니까 결국 JP와 연합한 것"이라며 "DJ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돼 있었다"고 평했다.
특히 87년부터 운동권 진영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비판적 지지론'('비지론')은 사실상 DJ을 지지하기 위한 운동권 담론이었다. '독자정당론자'들에게 '비지론'은 진보정당 성장의 걸림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지론은 '지지'가 아니라 '추종'이었다. 진보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지론자들은 거의 대부분 DJ 품에 안겼다. 비지론이 남한사회에서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장애가 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노선과 강령이 다르면 당연히 당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힘이 있든 없든 당이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은 시기상조'라며 당을 해산한 것이야말로 민중당의 최대 잘못이었다. 해산하지 않았더라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DJ가 진보정당 걸림돌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