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노무현 사후 보여준 모습 인상적"

87년 'DJ지지 옥중서신' 쓴 최규엽 새세상연구소장

등록 2009.08.20 10:11수정 2009.08.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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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권위주의 정권을 겨냥한 87년 6월항쟁은 '직선제 쟁취'로 이어졌다. 이후 재야운동권의 관심은 DJ-YS의 후보단일화 성사여부로 쏠렸다. 하지만 후보단일화는 실패로 돌아갔고, 재야운동권도 양김에 따라 분열했다.

독자후보론보다 후보단일화론에 서 있었던 최규엽(56) 당시 남노련 의장(현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장)은 'DJ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면회온 아내에게 구술했다. 최 의장의 'DJ 지지 옥중서신'은 이후 유인물로 만들어져 꽤 널리 배포됐다.

"71년 전주고 유세 때 '예비군 폐지' 주장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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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엽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장. ⓒ 오마이뉴스 구영식

DJ가 서거한 지 이틀째인 19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사무실에 만난 최규엽 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86년에 수배됐는데 87년 잡혀서 감옥에 갔다. 당시는 6월항쟁이 끝나고 (양김이) 후보단일화한다고 할 때다. 나는 후보단일화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후보단일화가 안되면서 표를 한군데 몰아줘야 했다. 그때만 해도 교도소 안이 자유로워서 면회를 1시간 가까이 허용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DJ지지 선언문을 불러줬다. 그걸 아내가 받아적어 유인물로 만들어 뿌렸다. 아내가 중원문화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황세연 사장도 DJ지지자였다."

6월항쟁 당시 각 운동권그룹은 ▲ 제헌의회 ▲ 삼민헌법 ▲ 헌법제정민중회의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최 소장은 '직선제 챙취'가 가장 현실적인 행동구호라고 생각했다.

"일부 그룹들은 독자후보로 백기완 후보를 냈는데 난 이들이 상당히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헌의회니 삼민헌법이니 혁명적 슬로건을 주장했으면 직선제를 부인했어야 했다. 선거를 보이콧하고 혁명하자고 해야 일관성이 있는 것 아닌가."


최 소장과 DJ의 인연은 DJ가 처음으로 대권에 도전한 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주고 1학년이었던 그는 학교운동장에서 열린 DJ 유세를 보러 갔다. 선생님들은 "절대 보러 가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의 호기심은 꺾을 수 없었다.

"DJ가 연설하는데 예비군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예비군를 폐지하겠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상당히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87년 옥중에서 DJ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최 소장은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반대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는 "DJ가 얘기한 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총통제를 하려고 한 것"이라며 "고 3학년의 눈으로 봐도 그건 쿠데타였다"고 술회했다.

DJ와의 인연은 87년 'DJ 지지 옥중서신'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명 '남노련 사건'(정확하게는 '민중사상연구회사건')으로 복역한 뒤 89년 출소하자 DJ쪽에서 S씨를 보내 '노동담당 특보'를 제안해왔다. 당시 S씨가 "면밀하게 검토해서 결정한 거니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최 소장은 이렇게 그의 제안을 일축했다.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냐? 난 노선이 달라." 

"정계복귀 이후 DJ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돼 있었다"

87년 대선에서 DJ를 지지했던 최 소장은 92년 대선 때는 '민주정부수립론'에 섰다. '독자후보를 선출하더라도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야당후보와 민주연합을 하자'는 주장이다.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을 독자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접촉했지만,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DJ쪽과 정책연합을 진행했다.

"전국연합이 DJ선본과 정책연합을 했는데 국가보안법 폐지 등 양쪽에서 합의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런데 DJ쪽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감표 요인이 된 것으로 평가했다. 정책연합의 내용이 너무 셌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DJ가 운동권과 거리를 뒀다. 그때 DJ가 대통령이 됐으면 많이 달라졌겠지만, 낙선하면서 그 이후 급격하게 보수화됐다."

당시 서울노동운동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최 소장에게 '웃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노조간부 교육자료집에 짧게 들어간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후보를 밀어야 한다'는 대목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혐의를 받아 수배를 당한 것이다.     

DJ는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뒤 97년 '대권 4수'에 도전했다. 앞서 최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그는 당선을 위해 '뉴DJ플랜'이라는 보수화 전략을 구사했다. DJP연합은 그 최종판이었다.  

최 소장은 "진보진영이나 운동권과 연합하려다가 안되니까 결국 JP와 연합한 것"이라며 "DJ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돼 있었다"고 평했다. 

특히 87년부터 운동권 진영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비판적 지지론'('비지론')은 사실상 DJ을 지지하기 위한 운동권 담론이었다. '독자정당론자'들에게 '비지론'은 진보정당 성장의 걸림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지론은 '지지'가 아니라 '추종'이었다. 진보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지론자들은 거의 대부분 DJ 품에 안겼다. 비지론이 남한사회에서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장애가 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노선과 강령이 다르면 당연히 당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힘이 있든 없든 당이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은 시기상조'라며 당을 해산한 것이야말로 민중당의 최대 잘못이었다. 해산하지 않았더라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DJ가 진보정당 걸림돌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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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7년 12월 대통령 당선증을 전해받은 김대중 대통령 부부. ⓒ 김대중 사이버기념관

최 소장에게 97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대선을 앞두고 최대 재야운동권이었던 전국연합이 독자후보('국민적 독자후보') 출마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비지론'을 붙잡고 있던 한총련과 전농이 대의원대회에 불참했지만 다수의 지지로 독자후보론이 통과됐다. 이후 민주노총과 진보정치연합 등도 독자후보를 출마하기로 결정하고 전국연합과 함께 독자적 정치조직인 '국민승리21'를 만들었다.

"당시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DJ가 당선되기 힘든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이 독자후보 출마를 결정하는 데 중요요인의 하나였다. 하지만 (DJP연합이 성사된 이후) DJ가 당선될 것 같으니까 상당수가 전국연합의 방침을 어기고 이탈했다. DJ쪽에서 (그의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독자정당 노선에서 이탈한 것이다."

97년 대선이 DJ의 승리로 끝나자 국민승리21도 분열했다. 이창복·유기홍·이인영 등은 DJ쪽으로 갔고, 최 소장 등 소수세력만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계속 독자정당노선을 걸었다.     

"일부에서는 DJ가 진보정당 성장의 걸림돌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DJ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정당 노선을 이탈해 DJ쪽으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또 DJ가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데 크게 연관된 것도 없고, 진보정당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도 없다."

최 소장은 DJ가 6·15선언을 이끌어냈고 국가인권위를 만들어 인권을 신장시킨 점은 높이 평가했다. 반면 집권하는 동안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점은 '최대 실정'으로 꼽았다.

"제일 잘못한 일은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이다. IMF 이전에는 비정규직이 거의 없었다. 파업 같은 것만 안하면 평생고용이 보장됐다. DJ 집권 이후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고용불안정이 심화됐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것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노동운동도 결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노동운동 성장에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특히 서민과 노동자 등을 잘 살게 하는 쪽으로 IMF를 극복했어야 했는데 재벌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렸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민중의 착취와 수탈을 통해 IMF를 극복한 것이다."

"DJ, MB퇴진 삼보일배 마친 강기갑 대표에게 직접 전화"

다만 최 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보여준 DJ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MB정부 아래에서 민주주의, 남북관계 등이 후퇴하는 상황을 두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한 대목은 그의 '정치적 유언'으로 남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에 DJ는 정세에 적극 개입했다. 경색된 남북문제를 풀기 위해 클린턴에게 북한에 가라고 한 것도 DJ였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MB퇴진을 주장하면서 청와대 삼배일보를 마치자 DJ가 직접 강 대표에게 '수고했다'고 전화를 했다. 아마 곳곳에 전화를 한 것 같다. '배후조종'을 한 셈이다."
#김대중 #최규엽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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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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