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아가씨의 유언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아줘"

특별한 '그녀의 죽음', 그리고 탄생이 있었다

등록 2009.09.18 09:30수정 2009.09.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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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소녀(?)가 있었다. 전장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죽음을 숨겼던 이순신 장군처럼…. 그러나 그 분은 장군이었고, 그녀는 슬픈 삶을 살다가 간 아가씨였다. 서른 즈음의 새파란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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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누구나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녀는 갔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은 이렇게 사진으로 남았다. '오지여행에서 그리고 시인의 마을로 문학기행을 가서 건강한 모습으로' ⓒ 이현숙


그녀는 자신이 죽고 난 다음 파다하게 퍼져나갈 소문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흘러 지금은 나와 그녀를 같이 아는 사람들이 내 곁에 없다. 한 때 만나서 공유하던 '주제'가 사라지자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바쁜 삶을 살고 있는 탓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이젠 아무개가 죽었다는 말조차 귀담아 들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난 과감하게 그녀의 죽음을 쓰기로 했다, 허락도 없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30대 아가씨

우리는 모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만났다. 많은 사람들 중에 그녀 또래는 둘이었다. 투박하고 다소 거친 듯한 인상의 그녀 A와 상냥하고 귀엽게 생긴 또 한 아가씨 B. 둘은 다 붙임성 있게 나를 따랐다. 그런데 내 마음은 상냥한 B에게 쏠려 있었다. 저녁 수업이라 수업이 끝나면 밤중이었지만 차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면서 잘 어울렸다.

A와 B를 같이 만날 때도 있었다. 같이 오지 여행도 가고 문학기행도 가고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도 갔다. 은하철도 999, 아빠와 크레파스도 부르고, 뽕짝에 가곡에 동요까지 신나게 불러제치며 놀았고 수다도 떨었다. 그러나 상냥한 후배B는 늘 내 곁에 있었던 반면 그녀는 어쩌다 한 번씩만 같이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고. 만나서 장을 봐다가 우리집에서(그땐 혼자 살았으니까)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배도 든든하겠다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집이 당산동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내게 바싹 다가와서 살짝 웃으면서 하는 말.


"언니, 나는 언니가 참 좋았어. 그런데 언니는 B를 더 좋아했지. 난 말야. 내가 언니한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언니가 나를 싫어할까봐 일부러 가끔씩만 만났어. 언니가 나를 영 싫어하면 큰 일 날 거 같아서."

이 무슨 해괴한 말. 늘 내 곁에 있으면서 상냥하게 굴어 줄곧 같이 다녔던 건데…. 그럴 듯하게 내 자신에게 변명을 했지만, 가슴은 뜨끔하게 데인 듯 아팠다. 그저 미안했고 그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사실 차별이란 하는 쪽에선 모른다. 받는 쪽에서나 처절하지.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 아이에게 더 잘 해줘야겠구나. 얘가 뭔가 열등감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녀는 철저한 마이너(?)였다. 처음엔 학습지 교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때려 치웠다. 그리고는 전화교환원, 판매원, 서빙, 과외 교사 등등 실로 다양한 알바를 전전했다. 왜 비교적 안정된 학습지 교사를 그만두고 그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만에 불쑥 한 마디.

"언니 난 말야. 처음엔 몰랐는데, 점점 아이들 사기쳐서 돈 버는 것 같아서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어. 그게 자꾸 양심에 가책이 되는 거야.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구."

아참, 정곡을 찔린 그 기분은, 아직도 아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지방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녔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 언니와 함께 올라와 학습지 교사며 다양한 직업(?)을 전전해 가며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쳤는데…. 딸 많은 집 둘째 딸이라 어려서부터 차별을 받았다고 했다. 둘째인 그녀를 낳고 또 임신이 되자 그녀는 곧 외할머니에게 맡겨졌고, 셋째도 또 딸이 태어났다. 셋째가 딸인 게 마치 그녀의 탓인 양 사내 동생 못본 죄로 어지간히 지청구를 먹었던 모양. 그녀는 울면서 어린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건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고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했고 성공해야 하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그런데 한 동안 소식이 뜸했고, 그 다음 전화에서는 아프다고 했다. 몸이 아파서 걸음도 잘 못 걸어 한의원에 다닌다고. 그리고 한 달 후, 전화를 해봤더니, 분당에 있는 병원에 있는데 검사결과가 심상치 않게 나왔다며 태연히 말했다.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겠다더니... 병원에 누워있다고

나는 그 날로 달려갔다. 근무가 끝난 저녁시간이었다. 당산동에서 분당까지 버스를 타고 갔는데, 이 버스 여기저기 들르는 데가 많아 깜깜한 밤중에 도착했다. 주말에 가도 되지만 난 그녀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다. 차별에 대한 나쁜 기억을 씻어 버리고 굳건한 네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뇌종양이라고 했다. 뇌종양도 다 다른데 그녀는 칼을 댔다하면 즉사하는 자리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치료를 했지만 몸은 점점 더 나빠졌고, 언니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돼 그녀도 같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내려갈 때 나는 약속을 했다. 꼭 한 번 보러 가겠다고.

그때 나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던 때였다. 작은 가게를 열고 있었는데 가게를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살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작은 가게지만 정리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의 두 달이나 걸렸고, 정리를 하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날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방법은 단 하나, 제주도를 가기 전에 그녀에게 들렀다가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여행 가방을 멘 채 그녀에게 갔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몸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고. 많이 쇠약해 죽음을 앞두고 있겠지, 했던 내 짐작이 틀렸나 보다 했다. 그런데 소변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도와주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는 언니가 와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금방 달려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비로소 이불에 덮여 있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더 앙상하게 상해 있는 가벼운 몸을. 나는 그렇게 쾌활하게 이야기하고 웃는데 설마 죽기야 할까, 하며 반신반의 했는데 그 믿음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알았다. 죽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언니, 사람은 왜 죽어야 하지? 그것도 나만 말야"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실토했다. 자신의 죽음을.

"언니, 내가 죽고 나서도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아줘."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말야. '그렇게 억척스럽게 발버둥치며 살더니 결국 죽었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아."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언니, 사람은 왜 죽어야 하지? 그것도 나만 말야."

오래돼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다.

"너만은 아니야. 누구나 죽잖니. 그리고 나도 말야. 지금 내가 제주도를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누가 아니. 비행기가 떨어져 내가 먼저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잖아."
"하긴 그래."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끝까지 '나을 테니까, 염려 말고 열심히 치료나 잘 해' 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진했다.

그녀의 집에서 나와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리고 공항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꼭 한 번 가겠다던 약속은 지켰지만 죽음에 대한 내 답변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죽음이라는 무거운 실상을. 정말 내가 아닌 타인이기에 그렇게 쉽게 말이 나온 거지.

두 달 후 그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름 전에 갔다고. 한 번 혼수상태에 빠져, 이제 가나보다 했는데, 한참 후,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더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꿈 이야기를 하더란다. 꿈에 두 사람이 자신을 데리고 가더란다. 냇물을 건너고 산길을 걸어서.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파 옆을 보니 구멍가게가 있더란다. 그래서 '나는 빵이 먹고 싶다'고 말하고 구멍가게로 들어갔다고. 그러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고 그 길로 가버렸단다, 머나 먼 나라로.

1년 후 나는 그녀 언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그녀가 가고 허전해진 마음을 어떻게 추스르며 살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데 언니의 목소리가 아주 밝았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언니, 동생 가고 저 아기를 가져서 낳았어요. 딸이에요. 지금 두 달 됐어요."

나는 잠시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아, 소멸하더니 다시 소생을 했구나' 아마도 죽음은 영 끝이 아닌, 탄생과 맞닿아 있었나 보구나,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덧붙이는 글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죽음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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