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이 이야기하는 진보와 보수의 가치체계 쟁탈전

[노무현 함께 읽기] 세 번째 서평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등록 2009.09.24 13:27수정 2009.09.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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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학자가 쓴 정치학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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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는 세계적 경제학자가 쓴 정치학 이야기다. 경제학자가 정치학을 이야기한 이유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제학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정치의 복원'이다. ⓒ 현대경제연구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현대경제연구원)는 정치학 책처럼 보인다.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정치경제학으로 불렸다. 용어가 어떻게 해서 '경제학'으로 굳어진 지는 모르겠지만, 이 용어는 경제라는 관념이 절대적 우월성을 숭앙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경제학이 정치와는 별개의 학문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정치와 경제를 굳이 구분하는 관습이 나타났다.


폴 크루그만의 언어와 주장은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평이하게 익힌다. 자신의 유년기와 2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운 미국의 상황을 회고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역설, 그리고 이를 위한 진보주의 운동을 결말로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국 정치는 원칙에 대해 같은 가치기준을 가진 정치인들 사이의 초당적 제휴로서 지배되었다
-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한다>, 18쪽

폴 크루그먼이 제시하는 가치는 보편적 진보주의이지만 진보당과는 차별된다. <미래를 말하다>의 지면 전체에서 보편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그 다음 문제다. 사실 이 대목은 정권을 빼앗긴 민주개혁세력과 지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보수주의 운동처럼 진보주의 운동은 민주당은 아니지만, 민주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직들의 집합이다. 민주당원 다수는 진보주의 운동가들이고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진보주의 운동은 민주당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폭넓은 개념이다. (337쪽)

크루그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균형 잡힌 풍요로움'이 50~70년대에 이르기까지 망가지게 된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그 중심에 보수주의 운동이 있다. 루스벨트에게 패배해 진보주의 시대를 열어줬던 보수파들은 수십 년 동안 눈물 겨운 와신상담 끝에 신자유주의 교리를 꽃피워냈다.


보수주의 운동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입증하면서 미국 정계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리를 옮겼다(26)
과거에는 공화당 정치인들 가운데 다수가 보수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적으로 확고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낙인이 찍히면 정치 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26)
보수주의 조직들은 단순히 공화당 노선을 고수하는 정치인을 후원할 뿐 아니라 공화당 노선에서 벗어난 정치인들에게 제재를 가했다.(212)

사실상 보수주의자들이 공화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조선일보와 삼성이 한나라당, 청와대를 좌지우지하는 것과 같다. 크루그먼이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이 진보주의자는 한나라당, 청와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 전반과 싸우고 있다.


전선을 이렇게 규정해야 하는 근거는 두 가지 주제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첫째,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최대 목표는 단지 집권이 아니라 진보주의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 가치체계가 바로 루스벨트가 세웠던 "뉴딜의 시대"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자본가에게 든든한 후원을 제공받으며 세를 키웠고 보수주의 제도권 안에서 경력을 쌓고 출세한 드수자같은 직업적 보수주의 지식이이 생겨났다(153)
결정적으로 보수주의가 세력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언어가 필요했다. 영화배우 출신의 정치인 레이건은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레이건은 거의 비슷한 정책을 채택하면서도 일반인들의 인식과 편견에 부응하는 어투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의 연설은 버클리의 난해한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프랑크 장군이 어떻게 스페인 국민을 구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레이건이 찾아낸 것은 보수주의 운동에 진정한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 위의 책, 138쪽

미국이 의료보험개혁에 목숨 거는 까닭

진보주의, 보수주의 할 것 없이 목숨을 거는 전쟁은 바로 의료보험개혁이다. 이는 진보주의 운동의 필생의 꿈이며 좌절된 꿈이다. 그리고 오바마가 지금 가장 크게 꾸는 꿈이기도 하다.

사실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는 1946년 트루먼 대통령 당시부터 추진했던 야심찬 계획이다. 실제로 1946년에는 지금보다 통과시킬 확률이 더 많았는데 실패했다. 미국의학협회의 강력한 로비 때문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2억 달러를 풀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64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은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의료보험개혁에 실패하고 오바마 대통령도 고전 중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의료보험개혁을 달성하려고 60년 넘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보수주의자들이 이를 막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의료제도개혁은 폭넓고 진보적인 사안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이런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보수주의 운동이 의료제도개혁의 성공을 막으려고 그토록 모질게 결심한 것이다. (327쪽)

미국 의료보험개혁 문제는 가치체계의 전환을 의미한다. 뉴딜이라는 가치체계를 허물기 위해 보수주의자들이 집요하게 달려든 결과 신자유주의라는 가치체계를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가치체계는 커다란 도전을 겪고 있는데, 의료보험 개혁은 새로운 가치체계의 시대를 알리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의료보험개혁법안이 단순히 법안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법안이다. 단지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흘러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인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고 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당장 훑어만 봐도 보수주의 운동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지나 왔는지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라면 반드시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대개 선거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이라는 틀에서 논의하는 편협함을 보인다. 폴 크루그먼은 그것이 아니라 가치체계의 전쟁임을 분명히 하라고 조언한다. 최소 30년, 50년의 가치체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것이 관건이다.

덧붙이는 글 | <노무현 함께 읽기>의 기획 리뷰로서 블로거뉴스, 아고라, 알라딘 등에 동시 연재합니다. 매주 일요일 리뷰 기사를 올리고 나서, 독자 피드백을 포함한 포스트는 매주 화요일에 올립니다. 목요일 강독회를 참여하고 나서 리뷰, 피드백, 강독을 포함한 후기는 금요일에 올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노무현 함께 읽기>의 기획 리뷰로서 블로거뉴스, 아고라, 알라딘 등에 동시 연재합니다. 매주 일요일 리뷰 기사를 올리고 나서, 독자 피드백을 포함한 포스트는 매주 화요일에 올립니다. 목요일 강독회를 참여하고 나서 리뷰, 피드백, 강독을 포함한 후기는 금요일에 올릴 예정입니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현대경제연구원BOOKS, 2008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노무현 강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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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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