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을 포장하는 직원들원주 친환경급식제공센터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 직원들이 결식 아동에게 전달할 반찬을 포장하고 있다.
김도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들만 아니라면 그냥 (삶의) 끈을 놓고 싶을 때가 많아요."
어렵게 말문을 연 이영석(49·가명)씨는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씨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된 이른바 '워킹 푸어'(근로 빈곤층)다.
워킹푸어란 온종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이나 가정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워킹푸어를 전통적인 빈곤층과는 달리 일을 하고 있는데도 저축할 여력이 없어서, 당사자나 가족이 직업을 잃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곧바로 절대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는 취약계층으로 정의하고 있다.
희망퇴직 후 식당 차렸지만 투자금의 4분의 1만 남아이씨는 지난 2004년 9월까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다니던 회사원이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되어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만 근무했다. 기계를 다루는 데 남다른 소질이 있어서 회사의 인정을 받은 터라 동기들보다 일찍 승진도 했고, 그만큼 기반도 빨리 잡은 편이었다. 1988년 네 살 아래의 부인과 결혼해 아들(21)과 딸(18)을 두었다.
"IMF 때 회사가 어렵긴 했지만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때 동료들이 회사를 많이 떠나야 했는데, 그분들한테는 정말 미안했지만 참 다행이다 싶었죠."하지만 이씨에게도 안정된 월급쟁이 생활은 길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다시 감원 바람이 불었고, 이번엔 이씨가 희망퇴직 1 순위에 올랐다.
"아이들 키우느라 저축해 둔 돈도 없는데 이대로 나가면 안 된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솔직히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세상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2005년 가을, 이씨는 여러 달 창업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 끝에 퇴직금에다 24평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얻어 서울 강북에 고기집을 차렸다. 주변에 관청과 사무실이 밀집한 이른바 '목이 좋은 곳'에 차린 식당은 그러나 장사가 안됐다.
하루 종일 손님 대여섯 명이 고작인 날들이 이어졌고, 월세는 물론 종업원들 임금을 주기도 힘들었다. 다달이 모자라는 돈은 직장생활 중 들어 놓았던 적금과 보험 통장을 깨서 근근이 가게를 유지했다. 종업원을 줄이고 집에서 살림만 하던 아내까지 나와 가게를 거들었지만 이씨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렇게 2년 동안 고생만 하고 식당 문을 닫아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빚잔치'를 하고 나니 손에 남은 돈은 처음 투자했던 원금의 1/4도 채 되지 않았다. 집부터 줄여야 했다.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를 팔아 은행 대출금을 갚고 경기도 양주로 나왔다. 이사하던 날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에 이씨도 애써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과외도 못 시켜주고 학원만 간신히 보냈는데..."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이미 40대 중반을 넘긴 이씨를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서너달 동안 구인광고를 낸 업체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넣어보았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도 별로 없었다. 다급해진 이씨는 낮에는 주유소에서 시급 3000원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 일을 했다.
이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지만 한 달에 120만 원 벌기가 쉽지 않았다. 저축은 엄두도 못 내고 네 식구 생활비를 대기도 빠듯했다. 아내도 직업소개소를 통해 가사 도우미 일을 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일감이 많지 않아 걱정이다.
"작년에 큰애가 대학을 갔어요. 과외도 못 시켜주고 학원만 간신히 보냈는데도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을 가주어서 참 고마웠지요."대학에 들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던 아들은 작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를 했다. 이씨는 "아마도 말은 안 했지만, 2학기 등록금 때문에 부모님들이 걱정할까 봐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작년에는 일흔일곱 되신 노모를 모셔왔다. 그동안 모시고 있던 형님이 가정불화로 이혼하게 되면서 오갈 데가 없어진 어머니를 부양하게 된 것. 당뇨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의 약값까지 부담하려면 이씨는 "당분간은 죽었다 하고 일만 해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이씨는 얼마 전부터 집에서 김밥과 샌드위치를 만들어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가서 팔고 있는 '아내를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둘째가 올해 고3 올라가는데, 솔직히 대학에 붙어도 걱정, 떨어져도 걱정이에요. 어떻게든 아이들이 대학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 잡을 때까지는 뒷바라지해야 하는데, 당장 하루하루 넘기기가 빠듯한 형편이니…."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이씨의 모습이 고단해 보였다.
"저 같은 사람을 한 평짜리 인생이라고 한다더군요. 이제는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기도 죄송해서 그냥 잘 있으니 걱정 말고 계시라고 합니다."경제성장이 저절로 고용을 창출한다고?동대문구 전농동의 한 고시원에서 만난 심기수(28·가명)씨는 4년 가까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다. 고향이 충남인 심씨는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2006년 이후 계속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동안 공사장 막노동, 옷가게 점원에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심씨가 해본 일은 얼추 20여 가지나 된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낮에는 포장 이사업체에서 짐을 나르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고시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다른 일에 비해 이삿짐을 나르는 일은 보수가 나쁘지 않지만 '공치는 날'이 더 많다.
이렇게 일을 해서 한 달에 100여만 원을 번다. 그중 35만 원을 방값으로 내고 나면 나머지를 가지고 한 달을 살아야 한다. 심씨는 아직 한 번도 정식으로 취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업급여 같은 최소한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내일이 버겁습니다. 지하도에서 박스를 깔고 노숙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게 내 미래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잠이 들 때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아요." 전문가들은 이씨와 심씨 같은 근로빈곤층의 숫자가 이미 300만 명을 넘어섰다고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근로빈곤층이 급속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말이 상징하듯 민간부문의 고용 창출 능력이 저하되면서 일자리도 질적·양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경제성장이 저절로 고용을 창출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옛말이 된지 오래다.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이 화두가 되었고,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사회적 기업·사회적 일자리다.
'고용없는 성장'의 대안은 사회적 기업·일자리